참고자료

황희정승

길벗 道伴 2013. 6. 5. 13:59

 

황희정승설화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조선 초기의 재상 황희에 관한 설화. 인물전설에 속한다.

 그는 내외 관직을 두루 거치면서 조선 개국 초기의 문물과 제도의 정비에 힘썼다.

 이렇다할 정적(政敵)도 없이 비교적 순탄하게 정치활동을 한 것이 하나의 특징이며, 특히 청백리(淸白吏)의 표상으로 알려져 있다.
황희정승설화는
황희정승 이야기〉·〈계란유골〉·〈개가법 고치고 원망 산 황희〉·〈이인 황희정승〉·〈황희정승 탄생일화〉·〈황희정승과 딸〉·〈명판결을 내린 황희〉·〈청백리 황희정승과 박광대〉·〈황희정승의 판결 등 아주 다양한 내용이 있다.
대체로 그의 우유부단한 성격이 결국은 탈없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근원적인 힘이 되고 있다는 노장적(老莊的) 사고방식의 일단을 보여주는 삽화가 많다.

또한, 그의 장례에는 딸들이 상복을 입어야 하는데 하나밖에 없어서 찢어 나누어 입었다는 이야기 등 그의 청빈한 생활태도가 벼슬아치로서의 한 규범을 보여준다는 점을 강조한 삽화가 많이 있다.
황희의 청백리로서의 삶을 이야기하는 설화로는
청백리 황희정승과 박광대가 흥미롭다. 황희가 정승으로 살았으면서도 가난하게 살다 죽게 되자 여러 딸들이 자신들이 살아갈 방책을 마련해달라고 한다.

이에 공작이 날거미줄 먹고 사나, 남산 밑에 박광대가 하리라.고 유언한다.
그 뒤 중국에서 공작이 날아오자 황희의 지략이 생각나서 그 딸들에게 물으니, 그 유언을 말하므로 공작에게 날거미줄을 먹여 살찌워 중국으로 돌려보냈다.

 이 일로 황희의 가난한 처지가 밝혀져 어느 대감이 황희의 집에 달걀을 여러 수레 보냈다. 그런데 그 달걀에는 뼈가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참고문헌 文宗實錄, 齋叢話, 海東名臣錄, 韓國口碑文學大系(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01988).

황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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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
출생 1363년
개성
사망 1452년
국적 조선
별칭 호는 방촌, 자는 구부
학력 1389년 문과급제
직업 문인, 정치가

황희(黃喜, 1363년 ~ 1452년)는 고려조선 초기의 문신이며 재상(宰相)이다. 초명은 수로(壽老), 자는 구부(懼夫), 호는 방촌(厖村), 시호는 익성(翼成)이다.

본관은 장수(長水)이다

. 음서로 관직에 나갔다가 문과 급제 후 여러 벼슬을 거쳐 판서, 재상 등을 지내며 맹사성 등과 함께 세종대왕을 잘 보필하였다.

일반적으로는 청백리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조선왕조실록에는 뇌물수수[1] , 간통[2] 등 황희에 대한 좋지 않은 이력을 기록한 기사도 간혹 나타난다.

 조선 세종 때 18년간 영의정에 재임하면서 많은 치적과 일화를 남겼다.

목차

[숨기기]

[편집] 생애

[편집] 고려조

황희는 1363년(공민왕 12년)에 판강릉부사(判江陵府事) 황군서(黃君瑞)의 아들로 송경(松京 : 개성) 가조리(可助里)에서 태어났다.

 열네 살 때인 1376년(우왕 2년)에 음직으로 복안궁(安福宮) 녹사가 되었고, 스물한 살에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곧이어 스물세 살 때 진사시에도 급제했다.

그러나 관직을 사양하고 오로지 학문에만 힘쓰다가, 1389년(창왕 원년) 스물일곱 살로 문과(文科)에 급제하였고, 이듬해 성균관 학관(成均館 學官)에 보직(補職)되었다.

[편집] 조선 개국기

서른 살이 되던 해에 고려가 멸망하자 황희는 새 왕조 설립에 부정적인 다른 70여 명의 고려 유신과 함께 두문동에 들어가 외부와 일체 연락을 끊고 고려 왕조에 대한 지조를 지키려 하였다.

 결국 이성계는 두문동을 포위하여 나오기를 요구하였고, 이에 따라 두문동에 들어간 고려 유신 중 나이가 가장 어렸던 황희가 관직에 나가게 되었다.

조선에 들어와서 세자 우정자(世子 右正字)를 겸무하고, 조금 후에 예문 춘추관(藝文 春秋館)을 맡았다가 사헌 감찰(司憲 監察)과 우습유(右拾遺)에 전직(轉職)되었는데, 이후에 경원 교수관(慶源 敎授官)으로 폄직(貶職)되었다.

 그가 정치가로서의 수완을 발휘한 것은 47세에 지신사가 되던 때부터였다.

그는 태종의 극진한 예우를 받고, 그 뒤에 육조의 판서를 역임하는 동안 대사헌·지의정(知議政)·견명사(遣明使)·참찬·평안도 도순문사·한성판사(漢城判使) 등 내외의 주요 관직에 있으면서 문물(文物)과 제도의 정비에 노력하여 훌륭한 업적을 많이 남겼다. 그와 함께 점차 왕의 신뢰를 쌓아갔는데, 그는 중추원을 없애 병제를 일원화하는 작업을 무리없이 추진하면서 태종 이방원의 신임을 받게 되었다. 이후 태종은 모든 정사를 황희와 깊이 논의하였다.

[편집] 유배 생활

그러나 이조판서로 재직하던 1413년(태종 13년) 세자 제(禔 : 양녕대군)의 폐립(廢立) 문제에 반대 의견을 내어 태종의 노여움을 사서 좌천(左遷)되었다가, 1418년(태종 18년)에 충녕대군이 세자로 책봉되자 이에 반대하다가 결국 폐서인되어, 교하(파주) 지방에 유배된다. 이 해에 태종은 세자에게 양위하고 물러나는데, 이때 교하가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남원으로 옮겨서 5년을 더 머물러야 했다.

황희는 남원에서 도교의 이치를 따라 《춘향전》의 무대가 되는 광한루를 만들었다.

[편집] 복직

1422년(세종 4년) 태종은 그를 소환하여 직첩(職牒)을 주며 세종에게 부탁하여 곧 등용토록 하였다

. 비로소 의정부 참찬에 등용되는데, 이때 황희의 나이는 60세였다. 세종은 황희가 자신이 세자에 책봉되는 것을 반대했고 외숙부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지만, 그의 사람됨이 바르다는 것을 알고 과감히 유배에서 불러들었다.

그 후 황희는 이조판서와 우의정에 임명되었고, 69세 되던 1431년(세종 13)에는 영의정의 자리에 올랐다.

 이후 18년 동안 황희는 명재상으로서 세종을 잘 보필하여 태평성대로 이끌다가 1449년(세종 31) 87세로서 은퇴하였다.

그가 죽은 뒤 세종묘(世宗廟)에 배향(配享)되었다.

 

黃喜, 淸白吏와 黃金大司憲 사이에서


세종 대왕과 황희 정승

어느 겨울날, 퇴궐한 황희가 단벌인 옷을 벗어 부인에게 건넸다.

황희는 부인에게 옷을 뜯어 빨고 밤새 말려 꿰매면 내일 입궐할 때

입을 수 있을거라 이르고는 속옷차림으로 있었는데 갑자기

입궐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뜯어 빨아서 입을 옷이 없자 옷안에

있던 솜을 얼기설기 이어서 그 위에 관복을 입고 입궐했다.

황희를 본 세종은 황희의 관복 밑으로 나온 하얀 것을 양털이라

여기고 이상하게 생각했다.

 

 청렴하고 검소하기로 이름난 사람이

양털로 옷을 해 입다니.. 세종이 이에 대해 묻자, 황희는 사실대로

말했고 정승이 단벌로 겨울을 난다니 그럴 수는 없다며 세종은

비단 열 필을 내리도록 했다.

그러나 황희는 백성들을 생각하면

솜옷 한 벌로 과분하니 거두어달라 청했고 세종은 부끄러워 하며

비단을 내리지 않았다.

 

위의 일화처럼 황희에 관한 얘기들은 청렴하고 검소하면서 재치있고

너그러운 성품에 대해 설명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한국에서

학교를 다녔다면 황희? 청백리! 명재상! 이라는 공식을 아주

잘 외우고 있을거고.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우리의 뒷통수를 치고,

실록을 통해본 황희도 그렇다.

 

물론, 그게 황희의 잘못일까.

황희에게 청렴하고 검소한

이미지를 덧씌우고 이야기를 만들어내서 사람들과 아이들을

교육해서 여기까지 오게 된 과정에 있던 복잡한 사연 탓이 클것이다.

 

황희는 이미 고려때 벼슬을 했다가 조선이 개국하자 조선의 신하가

된 사람이다. 조선이 개국되었을때 황희는 서른의 나이였었다.

세종대에 가장 큰 활약을 하긴 하지만 이미 태종대부터 왕의

신임을 받는 신하였다.

태종이 세자를 양녕대군에서

충녕대군으로 교체하면서 황희에게 시련이 닥쳤왔는데.......

양녕대군이 문제를 일으켰을때 세자가 어리다거나 하는 등의

말로 세자의 편을 들었다는 게 문제가 되었다.

 

 

태종은 너의 간사함을 미워한다,

 얼굴도 보고 싶지 않다면서

황희를 도성밖으로 쫓아낸다.

태종의 입장에서는 세자에게

아첨하고 나중에 세자가 왕이 되면 그 덕을 보려 들러붙었던

사람들이 너무 미웠을 수 있고 황희가 그런 사람같아 보였을

수도 있다. 또한 세자를 새로 새웠으니 (사람)정리도

필요한 시점이였다.

 

황희는 세종 4년에 다시 도성으로, 돌아온다.

당시 그의 나이 예순이었는데 세종에게 왕위를 내어주고

물러나있던 태종에 의해 다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태종의 추천대로 세종은 말그대로 자신이 죽을때까지

황희를 놓아주지 않았다.

 

세종보다 2년을 더 살아서 아흔살에 죽을때까지 삼십여년동안

황희는 왕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기에 소문도 많았다.

 

세종실록에는 황희가 대사헌이 되었을때 금을 뇌물로 받아서

사람들이 그를 황금대사헌이라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는 그가 간통을 했고 상속받은 노비가 많지 않았는데도

노비가 많았으며, 여러해동안 매관매직하고 형옥을 팔았다는

내용도 덧붙여져 있다.

 관직을 사고 팔았고 죄를 지은

사람에게 뇌물을 받아 형을 줄여주거나 면하게 해주었다는

뜻이다. 또한 심술이 바르지 않아 거스르는 자가 있으면

몰래 중상하였다고도 하는데 이 기록은 세종실록이 편찬될때

문제가 되었다.

 

실록의 책임을 맡은 고위 관리들이 모여서 이 부분에 대해

'이런적은 없다' 고 하면서 고쳐야 한다고 소리를 높였는데

이 기록이 남은것을 보니 삭제는 하지 않었다.

 


황희 초상화

 

황희가 뇌물을 받고 간통을 저지르고 다른이를 중상했다.

는 얘기들은 정말 다 거짓말이고 헛소문일 수 있다.

원래 잘되는 사람에게는 시기와 질투가 쏠리는 법이니까.

그런데 황희는 실제로 청렴 결백한 이미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죄를 저지른적이 있다.

 

세종 9년, 황희가 예순다섯살 때의 일인데 황희의 사위

서달이 신창현이란 곳에서 아전을 때려서 죽게 했다.

황희는 신창이 맹사성의 고향이라 그에게 부탁해서 죽은

아전의 집과 화해를 시켜달라고 부탁했다.

 맹사성은 죽은자의

형을 달래는데 성공했고 서달의 죄가 세종에게까지 알려지는

것은 막는듯 했다. 하지만 예리한 세종이 발견했고

사건을 다시 조사하게 했었다

 

서달의 죄는 교형, 즉 교수혈릐 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었다.

 서달의 죄를 묻어버리려 했던 황희와 맹사성도

파면을 면하지 못한다.

 그러나 황희와 맹사성을 향한 세종의

'신임'은 너무나 두터웠기에 두 사람은 곧 복직되고

서달은 외아들이라 사형을 시키지 않고 유배형을 내렸는데,

그것도 속으로 바치게 했다.

속은 즉 '돈' 이라고 할 수

있는데 돈을 내고 벌을 받지 않았다는이야기다..

조선왕조실록은 이런 판결에 대해 '임금이 대신을 중히 여기'기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

 

어찌됐든 황희가 청렴결백한것과는 거리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증명된 셈이다.

황희에 대한 별명과 모든 소문이

사실은 아니더라도 황희는 그렇게 가난하지도, 정직하지도

않었다.

 세종이 그를 그렇게 아끼고 봐주었던 것은 황희가

정말 능력있는 관리였기 때문일것이라 생각을 하게한다.

 

황희는 윤리적으로 완벽한 벼슬아치는 아니었지만 일을

잘하는 사람이였다.

그에 대해 안좋은 소문을 옮기는 기록에도

'일을 의논하거나 할때 온화하고 단아하며, 의논하는 것이

다 사리에 맞아서 조금도 틀리거나 잘못됨이 없었다' 라고

되어있다.

 

게다가 황희는 거리낌없이 자기 의견을 말하는 타입이었다.

왕의 비위를 맞추려는게 아니라 자기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왕 앞이라도 주저없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아첨을 좋아하는 왕이라면 황희같은 사람이 정승의 자리에

오르기는 쉽지 않았겠지만 세종은 그러한 황희의 태도와

능력을 높이 샀다.

 

 

유교의 나라인 조선시대의 벼슬아치에게는 언제나 완벽한

성인군자가 될 것이 요구되었지만 세종에게 필요한건

'공무원'으로서의 탁월한 능력이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 무척이나 불공평한 일이긴 했지만 탁월한 능력만

있다면 세종은 다른 모든 과실을 눈감아 주었다.

 

세종과 청렴한 재상 황희. 라는 이미지는 무척이나

잘 어울리지만, 세종은 능력을 인정하면 다른걸 문제삼는

지도자가 아니었다. 무척이나 의외의 모습이지만

세종은 능력 위주로 사람을 썼고, 황희와 장영실이

그 대표적인 케이스이다.

 


황희 초상화2

 

황희의 졸기에는 그를 칭찬하는 말들이 줄줄이 있다.

'너그럽고 후하고 침착하고 중후하여 재상의 식견과

도량이 있었으며, 넉넉한 자질이 크고 훌륭하며 총명이

남보다 뛰어났다.

집을 다스림에는 검소하고, 기쁨과

노여움을 안색에 나타내지 않으며, 일을 의논할 적엔

바르고 당당하여 대체(일이나 내용의 기본적인 큰 줄거리)를

보존하기에 힘썼다.'

 

황희는 아마 품성이 좋은 사람이였을것이다. 다만, 청렴이라는

원칙에 매달리지는 않았던 사람이다.

결과만 놓고 보자면

세종과 황희의 파트너십은 최고의 결과를 끌어낼 수 있었지만,

당시로써는 다소 논란이 있는 파트너십이었든 것 같아보인다.

 

이런 황희 때문에 의문이 생긴다.

나랏일을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무엇이 우선되어야 할까? 철두철미한 도덕성일까,

유연하지만 누구에게나 인정받는 실무능력일까?

조선왕조실록을 통하여본 황희 정승의 내용들이다

 

 

말하기 좋다고 남의 말 말 것이...

남의 말 내 하면 남도 내 말 하는 것이...

말로써 말 많으니 말을 말까 하노라."

                                                  -옛 조상들이 읊은 노래-

 

황희 정승과 두 마리 소

황희 정승이 젊었을 때의 일이다.

황희 정승나중에는 훌륭한 정승이 되었지만

젊었을 때는 자신의 재주만 믿고, 제멋대로 행동한 적이 많았다.

그리고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고 함부로 말했다가 후회를 한 적도 많았다.

황희가 벼슬아치들의 미움을 받아 잠시 쉴 때 일이다.

황희는 이 기회에 전국 유람이나 하여 견문을 넓히기로 하고 길을 떠났다.

 남쪽 어느 지방에 이르렀을 때였다.

때는 마침 모내기 시기라 들판에는 사람들이 많이 흩어져서 부지런히 일을 하고 있었다.

황희는 땀을 식히려고 나무 그늘에 들어가 앉았다.

그런데 맞은 편 논에서 늙은 농부 한 사람이 누렁소 한 마리와 검정 소 한 마리를 부려 논을 갈고 있었다.

황희는 한참 구경하다 그 농부가 가까이 오자 물었다.

“누렁 소와 검정 소 중에서 어느 소가 일을 다 잘합니까?”그러자 늙은 농부는 일손을 놓고 일부러 황희가

있는 그늘까지 올라오더니 황희의 귀에 대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누렁 소가 더 잘 하오.”황희는 농부의 태도에 어이가 없었다.“그만 일을 가지고 일부러 논 밖으로 나오시오.

또 귓속말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늙은 농부는 이 말에 얼굴을 붉히며 대답하였다“두 마리가 다 힘들여 일하고 있는데 어느 한쪽이 더 잘한다고 하면 못한다고 하는 쪽의 손는 기분 나빠할 것이 아니오.

 아무리 짐승이라지만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잖소? 황희는 농부의 말을 듣고 자신의 부끄러움을

깨달았다.“감사합니다. 저에게 큰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황희는 농부에게 큰절을 하고 진심으로 고마워하였다.

 이 후 황희는 죽을 때까지 남의 단점이라고는 이밖에 내지 않았다.

그리하여 오늘 날 까지 훌륭한 정승으로그 이름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