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영토 넓히는 뉴 프런티어
① 재독 사진작가 김인숙 ◆
그녀의 사진 한장에 세계 `주목`

사진작가 김인숙(42). 그는 2000년 훌쩍 한국을 떠났다. 처음에는 뉴욕에 갔다가 곧바로 독일 뒤셀도르프에 여장을 풀었다.
뒤셀도르프는 `비디오아트의 창시자` 백남준이 `독일 현대미술 거장` 요셉 보이스를 만나 예술적 교감을 나눴던 곳으로 유명하다.
그곳에서 그는 세계적인 사진작가 토마스 루프 교수를 만나 미술의 기초를 다진다. 서른 살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 그것도 학교에서 사진이라곤 배워본 적 없는 김인숙의 `겁 없는 실험`은 그렇게 시작됐다.
2007년 뒤셀도르프 호텔을 찍은 사진 한 장 `토요일 밤(Saturday Night)`으로 전 세계인의 관심을 한 몸에 받은 여성 작가 김인숙. 쾰른에서 독일인 남편과 살고 있는 그를 남산에서 만났다.
짧은 머리에 거침없는 말투가 인상적인 김인숙은 올해로 외국 생활한 지 12년째다.
그가 외국 생활에서 얻은 것은 무엇일까. "외국에서 살면서 느낀 것은 결국 작가는 자신과의 싸움을 벌여야 한다는 거예요. 외국에서 공부를 통해서 뭔가를 얻는 게 아니라 효율적으로 작업할 수 있는 환경을 갖게 되는 거죠. 미술은 노력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또 언제 작업을 시작하는지도 중요하지 않죠. 싸울 준비가 돼 있느냐가 관건입니다."
`토요일 밤`에 나오는 66개의 방에는 저마다 사연이 있다.
어느 방에서는 살인이나 가학적인 성행위가 벌어지고, 어떤 방에서는 말끔하게 차려입은 여자가 목을 매달고 있다. 어떤 방에서는 한 아이가 방치돼 있다. 현대인의 고독과 소외를 사진 연출 방식으로 담아낸 그의 작업에 사람들은 매료됐다.
에디션이 많은 이 작품은 2008년 스위스 바젤아트페어에 나와 5분 만에 품절됐고 2009년 런던 크리스티 경매에서도 6700만원에 낙찰되며 당시 한국 작품으로는 가장 높은 가격에 거래됐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한국 작가에게는 처음으로 그에게 작품을 의뢰했다.
그가 찍은 작품은 뉴욕에 있는 고층 유리 건물로 현대인의 이중성을 표현했다. 그제서야 한국에서도 "김인숙이 누구냐"며 찾기 시작했다.
"`토요일 밤`은 독일 컬렉터의 지원을 받아 3년간 찍은 작품이죠. 외관은 따로 찍고 각 방은 스튜디오에서 연출해서 찍은 겁니다. 제작비만 5억원이 들었어요." 그의 또 다른 작품 `경매` 역시 `여성을 팔아야만 경제가 돌아가는 현실`을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 "영화가 소설이라면 제 작품은 詩"

김인숙을 세계적인 작가로 발돋움하게 만든 작품 "토요일 밤(Saturday night)"(300×460㎝). 뒤셀도르프 호텔 방 66개에서 벌어지는 장면을 담은 사진으로 작가는 3년 동안 각방 장면을 찍은 후 건물 외관과 합성했다. <사진 제공=김인숙>
"시간과 스토리가 있는 영화가 소설이라면 제 사진 작품은 시(詩)에 가깝죠. 사진 한 장에 스토리와 메시지를 담아야 하니까 그만큼 함축적이고 상징적인 게 많죠."
그가 한국에 있었다면 이런 결과물을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최근 한국을 찾은 이유는 세계 최대 쇼핑몰을 자랑하는 부산 신세계 센텀시티에서 `쇼핑중독`을 보여주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위해서다.
"신세계에서 최종 허가는 떨어지지 않았어요. 엎어질 수도 있겠죠. 독일에서 섭외한 인물들은 모두 자원해서 해줬는데 한국에서는 다 돈을 줘야 하더군요."
부산은 그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부산 유명 한식집의 2남1녀로 태어난 그는 서울의 한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으며 20대 때 부모를 모두 잃었다. 그리고 상속받은 유산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처음에는 자유로웠지만 얼마 안 돼 생활고에 시달렸다. 그래서 작가가 되려는 후배들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너네 집 살 만하냐"고.
"이 질문에 가끔 "네"라고 하는 아이들이 있어요. 그럼 (작가를)하라고 합니다. 작가에게 자신감과 착각은 진짜 필요해요. 자신을 믿어야 버틸 수 있고, 옆 시선을 차단하려면 어느 정도 `착각`이 필요하죠."
롤모델로 삼은 작가가 있을까. "조선 후기 김홍도와 신윤복 같은 작가가 되고 싶어요. 사군자를 그리며 선비의 절개를 그린 게 아니라 내가 살아가는 이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을 그리는 거죠. 실제 일어나는 것을 분류하고 나름 의미가 있는 것을 이미지화하는 현대판 풍속화가랄까."
현실을 탐구하기 위해 그는 신문을 굉장히 많이 본다고 했다. 작품의 중심에는 항상 여성이 있었다. 그는 예수의 일생을 단계적으로 보여주는 유럽 교회 건축물에서 예수 대신 여자의 삶을 보여주는 일을 진행하고 있다.
"똑같이 그린다는 것은 의미가 없어요. 마음속, 머릿속 뭔가를 끄집어내 이미지로 표현하는 것, 그래서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것이 진정한
현대미술이죠."
② 美코미디 배우 켄 정 ◆
할리우드 배꼽 훔친 사나이…"한국영화 출연이 꿈"

지난 6월 미국 뉴욕에서 열린 "트랜스포머3" 개봉 행사장에서 켄 정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 제공=파라마운트픽쳐스>
제리 왕을 연기한 배우는 `할리우드의 별`을 꿈꾸며 코미디언으로 변신한 한국계 켄 정(42)이다. 그는 미국 영화계의 심장에서 웃음으로 신한류를 열고 있는 특별한 배우다.
켄 정의 연기는 절묘하다. 한국계 배우로선 유일하게 순도 100% 미국식 코미디를 선보인다. 그러면서도 공들인 퓨전음식처럼 한국 관객 입맛에도 맞는다. 미국 드라마 `커뮤니티`로 이미 그의 매력에 빠진 이도 적지 않다.
켄 정은 괴짜 스페인어 교수 `세뇨르 챙` 역을 맡았다. 팬들은 거만하면서도 지질한 세뇨르 챙의 모습에 "챙스럽다"며 배꼽을 잡는다.
로스앤젤레스(LA)에 살고 있는 그와 어렵게 전화연결이 된 건 지난달 25일이었다. 그날은 `커뮤니티 시즌3` 촬영에 들어가기 하루 전이었다. 그는 "앞으로 한 해 동안 매우 바쁠 것 같다"면서 "그 바쁜 한 해를 매일경제와의 인터뷰로 시작해 부모님도 무척 자랑스러워하고 있다"며 기뻐했다.
켄 정은 이민 2세대다. 아버지는 대구, 어머니는 부산 출신이다. 그의 아버지는 유학 후 노스캐롤라이나 A&T 주립대학교 경제학 교수로 재직하다가 최근 은퇴했다.
사실 켄 정은 고등학교를 2년 만에 졸업하고 명문 듀크대학교 의대를 조기졸업한 수재다. 그러나 연기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하던 중 1995년 한 코미디 경연대회에서 우승하며 연기자의 길에 들어섰다. 낮엔 내과 의사, 밤엔 밤무대 코미디 배우로 지내던 그는 2007년 영화 `노크드업(Knocked Up)`으로 전업 연기자가 된다.
잘나가는 의사에서 코미디 배우가 됐는데 가족의 반대는 없었을까. 한 TV 토크쇼에서 켄 정은 "부모님 반대가 심했다. 지금도 심리치료 중이다. 하지만 주당 30달러를 보내드리니 잘나가는 줄 아신다"고 재치 있는 입담을 과시한 적이 있다.
하지만 사실은 "부모님과 의사인 아내(베트남계)는 항상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켄 정은 연기 재능을 대학교 연기 입문 수업을 들으며 발견했다. 아이러니하게 그의 연기자 변신을 반대했던 부모님이 가장 먼저 연기에 반했다.
`노크드업`에서 켄 정은 산부인과 의사 역을 맡았다. 의사 경력과 연기 경력을 두루 갖춘 그를 감독이 눈여겨본 것. 켄 정은 "의사 생활이 좋은 배우가 되는 데 직간접적으로 도움을 준다"며 "무엇보다 의사 공부가 고난을 견딜 수 있는 성숙함을 길러줬다"고 전했다.
◆ `트랜스포머3` 에서 제리 왕 박사 연기

한국계 할리우드 배우 켄 정이 "트랜스포머3(TF3)" 촬영 중 마이클 베이 감독(왼쪽) 앞에서 쌍권총을 든 채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 제공=파라마운트픽처스>
그가 벌거벗은 채 자동차 트렁크에서 뛰쳐나오는 장면은 MTV 무비어워즈 `최고 황당한 순간상`을 타기도 했다. 당시 미국 버라이어티지는 이 장면을 "영원히 팬들의 뇌리에 남을 것"이라며 극찬했다.
켄 정은 "전 세계 어디나 그렇듯 연예 분야 경쟁은 매우 치열하다"면서 "돈이나 명성보다 연기 자체를 즐기다 보니 좋은 일이 저절로 따라왔다"며 성공 비결을 밝혔다. 그는 지금도 오디션에 떨어지지만 그것도 일의 일부라고 생각하며 즐긴다.
켄 정은 "내 장기 목표는 연기로 가족을 부양하는 것이고 단기 목표는 그저 연기하는 것"이라며 "풀타임 연기자인 데다 연기로 아내와 네 살 난 쌍둥이 딸을 부양하고 있으니 내 삶은 성공한 것"이라고 말했다.
`TF3`에는 영화 `행 오버`를 보고 그에게 반한 마이클 베이 감독이 직접 발탁해 출연하게 됐다. 켄 정은 "베이 감독과 일하게 된 건 큰 행운"이라며 "이젠 막역한 친구가 됐다"고 전했다.
`TF3`는 올해 한국서 800만 가까운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순위 1위로 떠올랐다. 켄 정은 "많은 한국 팬들을 만날 기회를 줬다는 점에서 `TF3`는 내게 큰 의미가 있는 영화"라며 기뻐했다.
할리우드에서 한국계 배우 등 아시아계 영화인의 입지는 점점 커지고 있다. 켄 정은 최근 어떤 인터뷰에서 "내 자신이 미국에서 일고 있는 아시안 아메리칸 사회의 괄목한 만한 움직임의 한 부분"이라며 "우린 완전히 새로운 아시안 아메리칸 시네마의 정체성을 형성 중이다"고 말했다.
켄 정은 "김기덕 감독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은 평생 본 영화 중 가장 아름다운 영화"라면서 "한국 영화에 출연하는 건 내 꿈"이라고 전했다. 그는 "어릴 때 본 한국 코미디 영화가 있는데 촌사람이 `학교`를 `핵교`로 발음하는 장면이 기억난다"면서 "그게 무의식에 남아 지금 코미디를 하는지 모르겠다"며 웃었다.
③ 美 애틀랜타발레단 김유미◆
국내 무대 한번 못서본 발레리나, 美 유명 발레단 신데렐라 되다
`몸 통통하다` 국내선 외면
"발레는 기술 아닌 예술" 배워
`성공한 무용수`로 금의환향

김유미 씨가 지난달 서울 대학로 동숭아트센터에서 열린 "한국을 빛낸 국외 무용수" 공연에서 역동적인 몸짓을 선보이고 있다. <사진 제공=애틀랜타발레단>
미국 애틀랜타발레단 발레리나 김유미 씨(29). 8세 때부터 지금까지 무용밖에 모르고 산 그지만 정작 한국 무대에서 춤춰 본 일은 "거의 없었다"고 말을 이었다. 춤을 추고 싶었지만 발레리나 치고는 작은 키에 통통한 몸매 때문에 국내 발레단에 입단할 생각조차 안 했다. "깡마르고 얼굴이 갸름하고, 그런 사람들만 있는 한국 무용계에선 다양한 체격조건을 가진 제가 설 자리가 없었죠."
지금이야 고전발레부터 컨템퍼러리 작품까지 종횡무진 활약하는 김씨지만 5년 전만 해도 무용을 계속해야 할지를 고민했다고 했다.
"(이화여대)석사 논문을 마무리 지을 때쯤 국내 무용계 현실이 답답해지더라고요. 무작정 뉴욕으로 여행을 떠났죠. 그러던 어느 날 자그마한 발레 학원이 있기에 나도 모르게 들어가서 춤을 췄어요."
김씨 무용을 지켜본 발레학원 선생은 그에게 애틀란타발레단 오디션 소식이 담긴 전단을 쥐어줬다.
"운좋게 한 번 본 오디션에 덜컥 합격했어요." 하지만 무용수 기교를 비교적 중요시 여기는 국내 무용 환경에서 교육받은 그가 완전히 애틀랜타발레단에 젖어들기까지는 적응 기간이 필요했다.
"연습하는 도중 단장님께서 제게 우리 발레단에 예술가가 필요한 거지 기술자가 필요한 게 아니라고 말씀하셨어요." 단장 말 한마디에 충격을 받은 그는 지금까지 무용을 잘못 배웠다는 자책감에 빠져들었다.
김씨는 그때부터 자연스러운 감정표현을 통해 진정하게 무용을 즐기는 법을 배워나갔다. 입단한 지 3년을 훌쩍 넘긴 김씨는 고전발레 `신데렐라`에서 주인공 신데렐라를 맡는 등 숨겨왔던 재능을 발레단에서 마음껏 꽃피우기 시작했다.
"애틀랜타발레단은 무용수 개성이 존중받는 곳이에요. 그래서 제가 춤출 수 있는 곳이기도 하죠. 항상 단장님은 제게 `유미` 같은 무용수는 세상에 또 없다고 말씀해 주세요."
무용수로서 자신감을 되찾고 무대를 누비던 지난 봄 "올해 한국을 빛내는 국외 무용수 공연에 서 달라"고 부탁했다. 전화를 받은 김씨 마음은 착잡했다. 자신이 `밀려나서` 한 번도 서보지 못한 국내 무대를 이제는 `한국을 빛낸 무용수` 자격으로 선다는 게 선뜻 믿어지지 않았다. "애틀랜타발레단 공식 일정을 마치고 휴식하려던 차에 한국으로 돌아가 또 춤을 춰야 했어요. 힘들 게 뻔했지만 흔쾌히 무대에 서겠다고 했죠. 지금 생각해도 가슴 떨리는 순간이었어요."
지난 6월 말부터 7월 초까지 이어진 `한국을 빛내는 국외 무용수 초청공연`에서는 김씨를 비롯한 외국 무용단에서 활약하는 한국인 발레리나 6인이 무대에 섰다.
이번 공연을 함께한 발레리나 중에서도 김씨는 유일한 국내파였다. 중ㆍ고등학생 때 유학을 떠나 무용을 배운 다른 무용수들이 부럽진 않았을까. "그런 생각 안 해봤다면 거짓말이겠죠. 하지만 춤출 수 있는 자리가 있다는 것으로도 감사해요."
김씨는 세계 무대를 꿈꾸는 발레리나들을 위한 당부도 잊지 않았다. "신체조건에 좌절하지 말고 세계로 눈을 돌려보면 기회도 많고 할 수 있는 일도 많아요. 대신 첫발을 내딛는 도전정신과 무용을 끝까지 하겠다는 결심이 필요하죠."
④ 유럽 활동 재즈가수 나윤선 ◆
佛 "나윤선, 별 다섯개도 모자란 가수"
27세에 입문한 늦깎이 재즈가수
한국 가요에서 탱고까지 넓은 음색
데뷔 10년만에 유럽 무대 정상 올라

<사진 제공=허브 뮤직>
공연이 시작되자 얼마 후 갑자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적잖이 당황했지만, 차분히 노래를 불렀다. 공연은 2시간가량 진행됐고, 다행히 5000여 명의 관객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무대의 주인공은 한국인으로 유럽 재즈의 정상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나윤선(43)이었다.
"올 하반기 유럽 투어의 첫 공연인데 비가 내려 걱정을 많이 했어요. 다행히 단 한 분도 자리를 뜨지 않아 얼마나 감동했는지 몰라요."
그는 재즈 불모지 한국에서 온 천상의 목소리를 지닌 가수로 유럽 재즈계에서는 이미 유명인사다. 1995년 프랑스로 건너간 뒤 딱 10년 만에 유럽에서 일궈낸 성과다. 콧대 높은 프랑스 재즈 잡지로부터 "별 5개도 모자란 가수"란 찬사를 얻었고 매년 전 세계를 돌며 수십 차례 무대에 오른다. 2009년엔 프랑스 최고등급문화예술공로 훈장까지 받았다. 한평생 재즈만 알고 살아왔을 것 같은 그지만 스물 일곱에야 재즈의 길에 올랐다. 늦깎이 가수였기에 음악에 대한 욕심은 더욱 컸던 것.
"대학 졸업 후 광고회사에 잠깐 다녔어요. 제가 잘할 수 있는 일이 아니어서 고민하던 찰나에 친구에게 등 떠밀려 뮤지컬 오디션을 봤죠."
노래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던 터라 그는 오디션을 통과해 뮤지컬 `지하철 1호선`으로 데뷔하게 된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노래만 부를 줄 알았지, 연기나 그 외 부분은 빵점이었어요. 남 앞에 나서기도 싫어하는 성격이라 뮤지컬 배우는 무리였죠. 어영부영하다 27세가 됐죠."
막연히 노래를 공부하고 싶다고 말하던 나윤선에게 한 친구가 재즈를 권유했다. "실은 재즈가 뭔지도 모른 채 파리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어요. (재즈가) 단지 대중음악의 원류라는 얘기를 듣고 거기에 매료됐죠."
프랑스 파리에서 학교 4곳에 등록했다. 마치 늦바람 난 사람처럼 미친 듯이 재즈 음악 공부에 매달렸고, 얼마 되지 않아 해박한 재즈 지식을 갖게 됐다. 그러나 또 다른 고민거리가 생겼다. "흑인 가수 특유의 끈적함, 스윙감이 제 목소리엔 없었어요. 아무리 연습해도 안 된다는 그 절망감이 절 짓눌렀죠."
재즈마저도 그만둬야 할까 고민하던 그에게 영국 재즈가수 노마 윈스턴은 구세주였다. "메조소프라노 톤 음색의 가녀린 목소리도 재즈를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가수예요. 그제야 자신감을 갖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어요."
그날부터 나윤선은 닥치는 대로 노래를 불렀고 2001년 유럽 무대에서 데뷔했다. 그가 한국가요인 윤심덕의 `사의 찬미`에서 탱고인 피아졸라의 `망각`까지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재즈를 구사할 수 있는 건 이때의 경험 덕분이다.
동시에 그는 재즈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장르라는 점을 깨달았다고 회상했다. "재즈는 편협한 장르가 아니에요. 어떤 목소리든, 어떤 리듬이든 다 받아들일 줄 아는 포용력을 가지고 있죠. 누구나 부르고 즐기는 대중적인 음악인 셈이에요."
나윤선은 "죽을 때까지 재즈 가수로 살고 싶다"며 재즈에 대한 무한한 집착을 밝히기도 했다. "재즈는 와인과도 같죠. 시간이 지날수록 노래를 표현하는 감성이나 실력이 `숙성`돼요. 70ㆍ80대 재즈 뮤지션들의 공연을 보면 난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 역시 나이가 들면서 후배 가수들에게 그런 영감을 주고 싶죠. 일종의 책임감일지도 몰라요."
유럽 재즈를 대표하는 독일 재즈 레이블 액트(ACT)에서 2008년에 발표한 앨범은 출시 2주 만에 음반 판매 1위를 기록한 뒤 지금까지도 베스트셀러 자리를 내주지 않고 있다.
한국에서보다 유럽에서 더 많은 사랑을 받는 데 서운하진 않을까. "한국에서 그리 익숙하지 않은 장르인 `재즈`를 하는데도 국내의 관심을 많이 받고 있는 편"이라며 웃었다. 그러면서도 자신 외에 더 많은 한국의 재즈 뮤지션들이 세계 무대를 경험해봤으면 한다는 소망도 내비쳤다. 혼자보다 여럿이서 재즈를 알리고 싶다는 것. 재즈가 한국에서도 대중적인 장르로 자리 잡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라는 의미에서였다.
"클래식에선 유명 콩쿠르를 통해 우리나라 음악가들이 그 실력을 인정받았죠. 독일 오페라단에서는 한국 성악가들이 모두 귀국하면 문을 닫을 정도라고 해요. 재즈라고 그렇게 되지 말란 법 있나요?"
⑤ 美 유명 드라마 작가 브라이언 오 ◆
"마이너리티라는 게 가장 큰 무기죠"
`디오씨` `뱀파이어 다이어리` 등 참여
스필버그와 `폴링 스카이스` 작업 중
"한류 확산, 한국계 배우ㆍ작가 수요 늘어"

드라마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재미교포 브라이언 오(38)가 작업해온 작품들을 늘어놓으면 인기 드라마 순위표를 연상케 한다. 2003년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던 `디 오시(The O.C.)`, 미국 지상파 CW 채널 사상 최고 시청률을 기록한 `뱀파이어 다이어리(Vampire Diaries)`, 국내에서도 수많은 팬을 확보한 `라이프 온 마스(Life on Mars)` 등이다.
지난달 29일 전화 연결이 된 그는 들뜬 목소리로 "얼마 전엔 스필버그 감독과 전화 회의도 했다"며 "나는 운이 좋은 케이스"라고 했다.
"(미국 드라마 시장에서)국제 시장(international market)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다양한 인종의 인물을 등장시키려는 경향이 생겼어요. 특히 한국은 아시아 전체에 미치는 영향력이 크기 때문에 더 중요해지고 있죠."
미국 TV 산업의 중심에서 일하고 있는 그에게 "한국계라는 점 때문에 일하기 힘들지 않으냐"고 묻자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수출을 염두에 두고 다양한 인종의 배우를 캐스팅하면서 한국계 배우나 작가를 드라마에 섭외하는 사례가 늘어났다는 것.
김윤진과 대니얼 대 킴이 출연했던 드라마 `로스트(Lost)`에도 한국계 작가가 참여했다고 한다.
"대부분의 경우 작가들 중 저만 소수자(minority)인 때가 많아요. 지금 작업하고 있는 작품도 6명의 작가 중 저만 소수 인종이죠. 그래서 소수 인종 캐릭터가 있을 때 그 캐릭터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저밖에 없다는 게 장점으로 작용합니다. 할리우드에서는 삶의 경험이 색다르고 독특한(unique) 사람들을 선호하거든요."
하지만 모든 일에는 장점과 단점이 동시에 존재하게 마련이다. 그는 "로스트 첫 시즌에 참여했던 한국계 작가는 모든 인물의 에피소드를 다루고 싶어하는 제작진의 바람과는 달리 한국계 인물들의 이야기에만 집중해야 했다"며 "그런 게 단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그런 단점을 극복하는 그만의 또 다른 장점은 적응력이다. 그는 "빠른 적응력은 TV 분야에서 일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스킬"이라고 말했다.
"영화는 한 장면을 위해 수십 번을 찍기도 하지만, TV 분야는 정말 빠르게 돌아가요. 가끔은 스크립트를 제대로 생각하면서 쓸 시간도 없을 정도로 매일 엄청나게 많은 일이 벌어지죠. 그러니 그 순간 주어진 환경에 빨리 적응하는 게 중요하죠."
미국에서 태어난 그가 대학(애머스트대 영문학)을 졸업한 후 드라마 분야에서 일하게 된 것은 8년 전이었다. 그가 처음으로 참여했던 작품은 `킨 에디(Keen)`라는 드라마. 그는 "별로 유명하지 않았던 데다 아주 빨리 끝났다"며 웃었다.
"미국 드라마는 보통 6~8명의 작가가 한 그룹을 이뤄서 함께 일해요. 에피소드나 인물 캐릭터 등은 함께 정하되 각각 에피소드에 해당하는 스크립트는 나눠서 쓰는 형식이죠."
그는 글을 쓰는 데 있어서 `관계`를 가장 중요시한다고 했다. 특히 작품 속 인물 간의 관계뿐 아니라 시청자들과 작품과의 관계에도 신경을 쓴다. 시청자들이 작품 속 인물들의 이야기에 몰입하고 관계를 맺을 수 있어야만 드라마를 즐기는 것도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지금껏 그가 참여했던 작품이 다들 강한 `중독성`을 보였던 것은 아마도 그 때문이리라.
그런 그가 드라마작가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이쪽에서 일하고 싶다면 글을 잘 쓰는 게 제일 중요해요. 글을 잘 쓰는 데에는 나쁜 것이든 좋은 것이든 자꾸 쓰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고요."
⑥ 在캐나다 연극인 최인섭 ◆
이민자 삶 다룬 그의 작품에 캐나다 `감동`
2살때 아버지 따라 건너간 한인 1.5세대
`김씨네 편의점`으로 연극페스티벌 대상
남북한 가상 통일 다룬 차기작 준비중

"김씨네 편의점"에서 최인섭 씨는 집을 나간 아들 역할로 무대에도 오른다.
불과 한 세대가 만들어낸 그 단절과 아픔을 그려내 캐나다를 들썩이게 한 젊은 연극인이 있다. 캐나다 토론토에 살고 있는 한인 1.5세 연출가 최인섭(38ㆍIns Choi)의 연극 `김씨네 편의점(Kim`s Convenience)`은 한 이민자 가정을 섬세하게 다룬 작품이다. 그럼에도 지난 7월 토론토 프린지연극페스티벌에서 143개 출품작 중 `베스트 오브 프린지`로 선정되며 호평을 받았다.
7월 6일부터 17일까지 토론토 배서스트극장에서의 7차례 공연은 모두 매진됐고, 관객들은 기립박수를 보냈다. 입소문이 퍼지면서 공연시작 두 시간 전부터 줄을 서는 진풍경도 벌어졌다. 캐나다 현지 관객들이 한국인 이야기에 공감하고 환호를 보낸 것이다.
최씨는 이메일을 통해서 "보편적인 이민자들 이야기였기에 인종과 문화에 상관 없이 자신의 이야기로 느낀 게 아닌가 싶다"며 "이민 1세대가 외국으로 건너와 새로운 삶을 꾸려나가려고 애쓰는 이야기는 이민자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주제일 것"이라고 털어놓았다.
토론토는 `이민자들의 도시`라 불릴 만큼 다양한 인종과 배경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도시. 연극 속 무대는 토론토 다운타운 리젠트파크의 `김씨네 편의점`이다. 주인공 김씨는 이민 1세대의 자존심 강한 사내. 성실한 아내와 서른살 딸과 가게 위층에 딸린 작은 아파트에서 살아간다. 반항적인 아들은 집을 나간 지 오래다. 김씨는 항상 아이 중 하나에게 편의점을 물려주고 싶어하지만 집을 나간 아들은 영 돌아올 생각이 없다. 어느 날 편의점을 후한 가격에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나면서 극은 요동치기 시작한다. 극은 매각 제의를 받은 후 하루 동안 벌어지는 이야기다.
토론토 현지의 나우(NOW) 매거진은 "모든 세대와 계층을 감동시킬 수 있는 힘과 유머러스함이 돋보이는 작품"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성경의 `돌아온 탕자`에서 영감을 받았어요. 세대차이와 문화차이에서 오는 아버지와 딸의 갈등, 집을 나간 아들과 그를 기다리는 어머니 이야기 등이 오버랩되죠."
작품에는 여러 면에서 자전적인 요소가 녹아들 수밖에 없었다. 두 살 때 목사인 부모를 따라 캐나다로 이민간 그는 "부모님은 아직도 영어를 잘 못 하셔서 아버지는 아직도 ESL(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영어교육 프로그램) 수업에 다니신다"고 했다. 극에는 이민과 정착을 통한 부모ㆍ자식 간 갈등은 물론 영어를 못해 겪는 웃지 못할 사연도 들어 있다. 김씨는 한국인의 가장 보편적인 성. 극의 제목을 `김씨네 편의점`으로 붙인 것도 그만큼 보편적인 이야기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에게도 이 작품은 첫 극작 도전이란 의미가 있었다. 요크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현재 캐나다 소울페퍼 극단에서 연기와 연출에 매진하고 있는 그가 첫 작품으로 한국인을 그린 까닭은 뭘까. 그는 "현재 캐나다 주류문화엔 한국인, 나아가 아시아인 이야기가 많지 않아 내가 이곳에서 한국인의 목소리가 될 수 있었으면 했다"고 말했다. "어린 시절 이민을 왔지만 부모님께서 항상 내 삶과 예술의 중요한 후원자이셨기에 캐나디안이지만 그만큼 한국인으로서 자아도 강하다"며 "이민자들의 삶과 경험에도 깊게 연결되어 있고, 그들의 삶에 경의를 표하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현재 집필 중인 차기작은 남한과 북한의 가상 통일을 다룬 부조리극 `Northern Korea`다. 그는 "한국과 관련 없는 이야기를 쓰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현재로서는 한국인의 희망, 꿈, 고민 등을 좀더 다루고 싶다"고 했다. 프린지페스티벌에서의 수상으로 `김씨네 편의점`은 8월 5일까지 토론토아트센터에서 연장 공연 중이다.
그의 바람은 이 작품으로 한국인 커뮤니티가 있는 뉴욕, LA, 밴쿠버 등 북미의 모든 도시에서 투어공연을 하고 서울에서도 관객을 만나는 것. 그는 "미래의 한인들에게도 이 연극이 타임캡슐과 같은 구실을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은 한 연극인을 통해 곧 이역만리의 동포들은 눈물을 훔치게 될지도 모른다. 그들의 자화상과도 같은 무대를 마주하면서 말이다.
⑦ 美 워너브러더스픽처스 수석부사장 준 오 ◆
"디캐프리오 몸값 내가 결정하죠"
`인셉션` `그린랜턴` 판권 계약·투자 총괄
할리우드 스타들 몸값 좌우하는 영화계 거물

그는 워너브러더스 영화의 감독 배우 프로듀서 작가와의 계약을 책임지고 있다. 판권 계약과 투자 계약 등 영화 제작에 필요한 금융 및 법무 업무는 전부 그의 담당이다. 올해 워너의 개봉작 중 최대인 2억달러의 제작비가 투입된 `그린랜턴(2011)`, 지난해 전 세계에서 82억달러의 매출을 기록한 `인셉션(2010)`도 그의 손을 거쳤다.
전화 인터뷰 직전 오 부사장은 9월 제작에 들어가는 영화 두 편의 캐스팅을 한창 마무리하던 중이었다.
"아침엔 유럽쪽 업무를 처리하고 저녁엔 지금처럼 아시아쪽 일을 봅니다. 낮엔 디캐프리오 주연의 `위대한 개츠비`와 숀 팬 주연의 `갱스터 스쿼드`의 캐스팅을 마무리하느라 정신이 없었죠. 요즘도 수백 개의 대본을 읽으며 작가와 감독, 배우와의 계약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오 부사장은 다섯 살 때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간 동포 1.5세대다. 부모님은 그에게 더 큰 기회를 주기 위해 친척이라곤 한 명밖에 없는 이국 땅에 맨손으로 건너왔다.
하지만 영어도 서툴던 어린 오 부사장에게 미국은 아메리칸 드림보단 악몽에 가까웠다. 아이다호주나 유타주 모두 소수인종이 거의 살지 않아 인종차별이 심했기 때문이다.
"고교시절 학교 친구들은 아시아계인 저를 놀려댔죠. 전 성적은 좋았지만 맨날 싸움만 하고 다녀서 부모님 속을 썩였어요."
동부 명문 코넬대를 졸업한 오 부사장은 한국으로 돌아와 울산 현대중공업 법무팀에서 일했다. 1년 뒤 그는 UCLA 로스쿨에 입학했다.
한인을 비롯해 유색인종이 많이 사는 로스앤젤레스는 유타와는 달랐다. 특히 할리우드의 자유분방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로스쿨 졸업 후 그는 샌프란시스코의 로펌에 취업했다. "엔터테인먼트업에 관심이 많았아요. 로펌에서도 연예산업과 관련된 법무를 담당했죠."
곧 첫 번째 기회가 찾아왔다. 디즈니에서 함께 일해보자는 제안이 들어온 것. "디즈니에서 일하던 중 워너브러더스에서 함께 일을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이 들어왔을 땐 제 인생에서 가장 기쁜 순간 중 하나였습니다."
디즈니에서 `레이디킬러(2004)` `레더49(2004)` `빌리지(2004)` `프리스티지(2006)` 등의 계약을 담당한 그는 2007년 워너브러더스인디펜던트픽처스(WIP) 사업 및 법무 담당 대표로 옮겼다. `슬램독밀리오네어(2008)`의 제작에 필요한 공동투자 및 공동배급 업무를 맡았던 그는 WIP가 본사에 흡수되면서 자연스레 본사로 옮겼다.
`인셉션`에선 영화와 관련된 모든 계약을 담당했다. "디캐프리오는 계약하기가 매우 까다로운 사람이기에 힘들었죠."
최근 본 한국영화 중에선 `추격자`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전했다. "자국영화의 시장점유율이 60% 넘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어요. 미국에선 일본영화는 공포영화, 중국영화는 무협영화라는 인식이 강한데 한국영화는 다양한 콘텐츠로 소개된 점이 강점이에요."
워너도 한국영화에 관심이 많다고 귀띔했다. "워너가 아직 직접 투자한 건 없지만 한국 감독과 계약 직전까지 간 적은 몇 번 있어요. 조만간 가시적인 결과가 나올 겁니다."
한국영화가 본격적으로 할리우드에 진출하려면 인맥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감독은 훌륭한 영화를 만들기만 하면 돼요. 하지만 제작자는 할리우드에 많은 컨택포인트가 있어야 합니다. 시나리오도 배우들이 관심을 가질 만큼 좋아야 하죠. 배우도 감독과 스튜디오 눈에 띄어야 합니다. "
오 부사장은 한국콘텐츠진흥원(KOCCA)이 선정한 코리안 아메리칸 인 할리우드 멘토 2기 멤버로 활동 중이다. "KOCCA의 멘토 프로그램은 멘토끼리 정보를 교류하고 네트워킹을 쌓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이 한국계 미국인 영화인에게 매우 중요한 순간이라고 강조했다. "할리우드에도 한국계 미국인 배우가 늘고 있어요. 존 조처럼 오래전부터 성공한 배우도 있지만 최근엔 켄 정이나 제이미 정처럼 새로운 배우가 늘고 있어요. 아시아 시장이 확대되면서 이들 배우의 역할도 커질 거에요."
⑧ 빈에서 활동 바이올리니스트 정상희 ◆
바이올리니스트 정상희 "이방인의 실수는 끝…어금니 물었죠"
국립빈음대 최연소 수석 입학으로 주목
미샤 마이스키 등 거장들 협연 요청 잇달아

[사진 = 이충우 기자]
지난달 16일 체코 체스키크룸로프 국제음악제 무대에서 내려온 바이올리니스트 정상희(22)의 얼굴은 더없이 행복해 보였다. 대기실에서 마냥 시선을 바이올린에 내리꽂은 채 미소를 지어보이던 대학생 연주자. 우리나라에서 그의 이름은 아직 생소하다. 그러나 그는 이날 밤 첼로의 거장 미샤 마이스키(63)와 협연을 한 연주자였다. 은발의 노장과 까만 머리 신예 연주자의 하모니는 1000여 명 관객의 귀를 사로잡았다.
1000여 명 중 동양인 관객은 10명도 채 되지 않았던 유럽 소도시에서 정상희는 무대에 섰고, 기막힌 연주를 들려줬다.
체스키크룸로프에서의 만남을 뒤로하고 최근 서울에서 정상희를 다시 만났다. 여름방학을 맞아 한국을 찾은 그에게 서울생활을 만끽하고 있는지 물었더니 엉뚱하게 날씨 걱정을 했다. "비가 이렇게 자주 와서 어쩌죠? 습기에 약한 바이올린이 제 소리를 못 낼까 봐 걱정돼요." 하루라도 연주를 쉬면 마음이 불편하다는 그다운 말이었다.
국립 빈 음대를 만 17세에 수석으로 입학한 정상희는 떡잎부터 남달랐다. 6세 때 동네 학원에서 취미로 바이올린을 켜다가 재능이 있는 것 같다는 학원 선생님 말에 평생 바이올린과 함께하기로 마음먹은 당찬 아이였다.
음악가로서 차곡차곡 준비하던 중 2007년 1월 오스트리아 유학길에 올라 타향살이를 시작했다. 유럽으로 건너간 지 어느덧 5년 차. 유럽 유명 오케스트라의 협연 요청이 쇄도할 만큼 그의 실력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게다가 마이스키가 추천하는 바이올리니스트로 거듭났다.
"유럽 오케스트라단, 연주의 거장들과 협연하는 건 멋진 일이에요. 하지만 비유럽권 연주자인 저는 그 기회를 몇 배로 활용해야 하죠. 한 번의 실수로 매장당할 수도 있거든요."
동양인 연주자로서 세계 무대에 선다는 일은 냉철하고 혹독한 평가를 받는 것을 의미한다. 정상희는 이 사실을 오스트리아에 건너가자마자 알게 됐다고 했다.
"유럽 오케스트라와 협연할 땐 뒤통수가 정말 따가워요. 악단 전체가 저를 노려보고 있는 거죠. 그 압박감을 견뎌내는 게 가장 힘들었어요. 하지만 그 기에 눌려버리면 그 순간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게 돼 버려요. 그럴수록 어금니 콱 물고 음악에 빠져들려고 노력합니다."
남다른 노력 덕분에 정상희는 유럽 음악계에서 비교적 빨리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적지 않은 음악팬을 거느리게 됐다.
그의 공식 홈페이지를 찾아보면 영어, 독일어로 응원 메시지를 남기는 팬들의 글이 가득하다. 그가 무대에 섰던 음악회에 대한 감동을 전하는 글도 틈틈이 올라온다.
"언어가 다르고 모습이 달라도 음악이라는 만국 공용어로 소통한단 느낌이 들어요. 그렇기에 연습을 게을리할 수 없죠." 그러면서 그는 음악가에게 `재능`보다 `노력`이 더 필요하다고 당차게 말했다. "재능이 있으면 시작은 편할 수 있어요. 하지만 재능만 믿고 과정에서 노력을 소홀히 하면 쉽게 도태되고 말아요. 유학 와서 `천재`라는 음대생을 많이 만나봤지만 노력하는 사람을 이기는 건 본 적이 없어요."
정상희는 앞으로도 유럽의 수많은 음악가들과 협연이 예정돼 있다. 벌써부터 내년 3월 이탈리아 로마에서 있을 협연 준비에 한창이다. "세계 무대에서 좀 더 활약한 다음 한국에서 활동하려고 해요. 훗날 한국 클래식 음악계와 유럽 클래식 음악계를 잇는 교두보 구실을 하고 싶습니다."
⑨ 키네틱 아티스트 최우람 ◆
최우람 "나에겐 테크놀로지가 물감이죠"
로봇 회사 다니다 키네틱 아트에 눈떠
기계에 예술적 감성 입혀 세계가 주목

다음달 미국 뉴욕 맨해튼 아시아소사이어티뮤지엄에서 개인전을 여는 작가 최우람이 서울 연희동 작업실에서 작품 ‘오페르투스’ 앞에 앉아 있다. [사진 제공=김중만 사진작가]
개막 전날 부스에서 밤 늦게까지 작품을 설치하던 그에게 바닥을 닦던 한 청소부 아주머니가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굿(good)`이라는 사인을 보낸다. 그제서야 온몸을 휘감고 있던 불안과 걱정은 눈 녹듯 사라진다.
"그날 감격해서 한국에 있는 아내에게 전화했죠. 작품이 팔리지 않아도 좋다고." 감격은 그 이튿날에도, 8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움직이는 기계에 예술적 감성을 입히는 `키네틱 아트(kinetic artㆍ움직이는 미술)` 작가 최우람. 그는 요즘 외국 아트페어에서 작품이 없어서 못 팔 정도로 뜨거운 인기를 실감하고 있다. 8년 전 무모한 것처럼 보였던 그의 도전이 무럭무럭 결실을 맺고 있는 것이다.
최근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작업실에서 만난 그는 28시간째 눈도 붙이지 않고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코앞으로 다가온 뉴욕 개인전 준비 때문이다. 그는 미국 내 대표적인 아시아 작가 무대인 `아시아소사이어티뮤지엄`에서 다음달 초 개인전을 연다.
"거대한 신작 한 점을 전시장에 설치할 계획이에요. 신작을 내는 자리는 늘 긴장됩니다. 잘하고 싶고 칭찬받고 싶어서요."
그가 처음으로`올인`했던 외국 무대는 2006년 일본 도쿄 모리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었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 그는 재료를 구하기 위해 지인들에게 8000만원을 꿨다. 한국 작가로는 처음으로 모리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여는 작가로서 욕심이 났다. 일본 롯폰기힐스 모리타워 53층에 위치한 모리미술관은 아시아와 서구 미술 관계자들이 주목하는 전시장이다.
결과는 `대성공`. 이 전시를 계기로 그는 세계무대를 휘저을 초석을 마련했으며 국내에도 번듯한 작업실을 마련했다. "대학 졸업(중앙대 조소과) 후 로봇회사에 취직해 사무실 한켠에 쭈그리고 앉아 로봇 등을 만들었죠. 2~3년 뒤에는 월세로 근근이 지하작업실을 빌려 생활했어요. 월세를 내지 못하면 그만두자는 심정으로요."
연희동 3층짜리 작업실은 철물점을 방불케 할 정도로 각종 공구와 기계류로 가득했다. 금속을 자르고 연결하고 도금하는 것이 모두 이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그의 작품은 고대에 존재했을 법한 새나 조가비, 가로등에 기생하는 벌레나 곤충을 연상시키는 생명체를 소재로 한다. 작품 이름은 그가 새로 지어낸 학명들로, 이를테면 `어바누스` `울티마 머드폭스`식이다.
이 작품들은 움직일뿐더러 불빛을 뿜어내고 있어 흡사 숨을 내쉬고 있는 생명체 같다.
"어렸을 때부터 과학자처럼 뚝딱뚝딱 만드는 것을 좋아했어요. 로보캅이나 아톰, 태권브이가 한창 인기였을 때 어린 시절을 보냈죠. 제게 기계나 테크놀로지는 물감이고 돌입니다. 제가 느끼는 감정과 감각을 표현하는 자연스러운 도구인 셈이죠."
그는 뼛속까지 토종파다. 지난해 미국 뉴욕에서 `두산레지던시 프로그램` 덕으로 6개월간 체류했지만 되레 외국 생활에 대한 미련을 버리는 계기가 됐다.
"제 작업 특성상 공구와 금속이 필요한데 뉴욕은 너무 느려요. 청계천에서는 하루면 될 일을 뉴욕에서는 재료를 받을 수 있는지 답변을 받는 데만 한 달이 걸리더군요."
서울 예찬론자인 그는 외국 활동이 부럽지는 않다. 외국 유명 미술관 관계자들이 한국을 찾을 때마다 그를 찾기 때문이다. 그는 어느덧 `한국에서 꼭 만나야 할 작가`가 됐다.
"제 작품의 장점은 어렵지 않다는 것이죠. 작품이 움직이고 관객에게 적극적으로 보여주려고 하니까. 무엇보다 제 작품을 보면 한국 사람이 만든 건지, 외국 사람이 만든 건지 가늠하기 어려워요. 지구인이라면 으레 느끼는 감성으로 접근하니까."
⑩ 美 MTV 프로듀서장 크리스티나 리 ◆
크리스티나 리 "변호사로만 살긴 싫었어요"
로스쿨 졸업후 증권변호사 일하다 방송 뛰어들어
코미디 등 다양한 프로그램 총괄 컨설턴트로 활약

[사진 제공=콘텐츠진흥원]
미국 MTV에서 코미디ㆍ애니메이션 제작 기획 총괄 컨설턴트로 일하고 있는 크리스티나 리(36)는 독특한 이력을 자랑한다. 템플대학교 로스쿨을 졸업한 그는 증권 변호사로 일한 바 있다. 그러다 텔레비전 코미디 프로그램 제작 쪽으로 방향을 전환한 것이 2003년. 그 후 스파이크TV, VH1, ESPN 등을 거치며 리얼리티와 코미디 등 다양한 프로그램 제작에 참여했다. 1년 반 전부터는 MTV에서 일하고 있다.
"로스쿨을 정말 좋아하긴 했지만 법 분야에서 일을 하는 건 즐겁지 않았어요. 뭔가 직업을 가진다는 건 거기에 인생의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함을 의미하는데 그러기에는 제가 법에 충분히 열정적이지 않았죠. 대신 저는 항상 TV와 영화를 사랑하고 좋아했기 때문에 그 분야에서 일하기로 마음먹었어요. 직업을 바꾼다는 게 처음에는 쉽지 않았고, 아주 바닥부터 새로 시작해야 했지만 정말 가치 있는 선택이었다고 생각해요."
변호사로 일하던 그가 엔터테인먼트 업계로 옮긴 뒤 가장 처음 시작한 일은 제작사에서 전화를 받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경험을 통해 업계 분위기와 돌아가는 상황을 관찰할 수 있었다"며 "결코 시간낭비였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분야와)가깝다고 생각되는 일에서부터 시작해 나가라"며 "꼭 궁극적인 목표에 가까운 일에서부터 시작할 필요는 없다"고 엔터테인먼트 분야에서 일하고 싶어하는 젊은이들에게 조언했다.
"펜실베이니아에서 나고 자랐는데, 어릴 때 텔레비전을 너무 좋아해서 항상 끼고 살았어요. 그 시절 경험이 지금 일을 하는 데 도움이 많이 돼요. 시트콤이나 코미디 프로그램 작가들과 회의를 할 때면 예전 TV 프로그램을 기준으로 설명할 때가 많은데 그 프로그램들을 다 봐왔던 저로서는 이해하고 대화하기가 쉽거든요."
왜 코미디를 선택했느냐는 말에 그는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유머 감각이 뛰어났던 부모와 친척들은 농담으로 주변 사람들을 웃기는 데 소질이 있었고, 어린 마음에 그들과 경쟁하듯 재미있는 이야기를 생각해내며 자랐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공부에만 전념하기를 바라는 다른 부모들과 달리 그의 부모는 아이가 무엇을 하든 간섭하지 않고 최대한 많은 것을 경험하도록 지원했다고 한다.
"한국 사람들 최대 장점은 성실하고 열심히 일한다는 거예요. 하지만 `고개를 숙이고 일만 열심히 하는` 것이 단점이 될 수도 있죠. 나 혼자 하는 일은 잘 해내지만 큰 그림을 보는 능력은 떨어질 수 있거든요."
프로듀서장(executive producer)으로서 그가 맡은 일은 새로운 코미디 콘텐츠를 찾아 발전시키는 일이다. 프로듀서들이 가져온 아이디어에 대해 토의하고 파일럿 프로그램으로 제작할지를 결정한다. 스스로 새로운 아이디어를 개발해 내기도 한다. 그는 "프로그램을 개발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시청자로서 내가 그것을 즐거워하며 볼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우리는 인생에서 아주 많은 시간을 사무실에서 보내게 되잖아요. 그래서 저는 일하는 것이 행복해야 삶도 행복하다고 생각해요. 전 제가 이 일을 한다는 사실이 정말 즐겁고 행복해요. 그게 또 일을 잘하는 비결이기도 하죠."
⑪ 독일서 활동 설치작가 양혜규 ◆
양혜규 "능력보다 진실이 더 큰 예술 만들죠"
미대 졸업 후 독일서 데뷔…"시대에 충실하고 싶어"
미술가들의 꿈인 뉴욕 현대미술관에 작품 소장

설치작가 양혜규가 지난 9일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서 작품 "블라인드"를 배경으로 삶과 예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김호영 기자]
불혹의 나이 이름 석자 앞에 `세계적인`이라는 수식어가 낯설지 않은 작가 양혜규(40). 1994년 독일 유학을 시작으로 해외 생활 17년차인 그에게 외국 생활의 손익계산서를 들이밀자 이런 간단명료한 답변이 돌아왔다. 20~30대 피끓는 청춘을 외국에서 `소진`한 대가로 얻은 것은 지구촌 곳곳에서 `늘 전시 중`인 현 상황이 잘 말해준다.
2009년에는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에 단독으로 참가했으며 지난해에는 전 세계 각국에서 14개의 그룹전과 서너 개의 개인전을 가졌고, 현재도 미국 아스펜과 영국 브리스톨에서 전시를 열고 있다. 가을에는 일본 도쿄, 프랑스 툴루즈, 스웨덴 스톡홀름, 독일 베를린에서 단체전에 참여한다. 작년에는 세계 최고 권위의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 백남준과 정연두에 이어 한국 작가로는 세 번째로 작품이 소장되는 영광도 누렸다. 비행기를 타고 지구를 누비는 게 일상적인 일이 된 작가를 지난 9일 서울 소격동에서 만났다. 지구 반 바퀴를 돌아서 고국 땅에 도착한 지 정확히 20시간 뒤였다. 그는 만나자마자 서울 부암동 집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6개월간 비웠더니 홍수와 곰팡이로 집이 아수라장이 됐더군요. 하수구 물은 썩고 냄새는 진동하고…." 그의 가녀린 몸에는 인터뷰 때면 늘 입는 `검은` 옷이 아니라 하얀 블라우스가 걸쳐 있었다.
"지난 10년간 일년에 3~4개월씩 한국에 왔어요. 그전에는 올 때마다 전시나 프로젝트를 염두에 뒀는데 지금은 더 느끼고 생각하는 게 중요해졌어요. 새로운 것을 만들기 위해서는 건수 올리는 것보다 이를테면 태풍을 직접 겪어보는 게 도움이 되죠."
그의 작업은 부엌이나 히터, 블라인드 등 일상적인 재료를 소재로 삼는다. MoMA에 소장된 설치 작품 `살림(Sallim)`은 작가의 베를린 집 부엌을 기초로 한 개념적 설치작업이다. 실제 부엌 크기에 맞춰 철골구조를 만들고 그 안에 일상 용품과 가전기기, 부엌 집기를 설치하고 그의 취미인 뜨개질을 한 작품을 걸어놓았다. "`MoMA`에 소장됐을 때 기분은 환희보다는 안도감이 밀려 왔어요. 이 작업의 미래가 보장된 것 같고 오랫동안 보살핌을 받을 것 같아서…."
소소한 개인의 삶을 그리고 있지만 그는 개인의 삶이 공동체적 운명을 피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제가 해외에서 유학하고 활동하는 것도 시대가 요구한 측면이 있죠. 처음에는 내 개인의 의지라고 생각했지만 모든 개인의 운명은 사회적으로 프로그램화된 것 같아요."
그는 90년대 엘리트 코스(서울예고-서울미대 조소과)를 밟은 뒤 독일 프랑크푸르트 미술학교에 진학했다. 그에게 유학은 세계화 바람이 거셌던 90년대 사회적으로 일정 부분 강요된 선택이었을까.
"시대에 충실하면서 시대를 뛰어넘어야 하는 게 작가의 딜레마죠." 충실의 의미를 묻자 "시대가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좋으면 좋은 대로 살아주는 것"이라며 "시대를 읽고 계산하는 처세와는 다르다"고 선을 그었다.
"당시 유학 시절 유럽에서는 한국에 대해서 편견이 끼어들 여지가 없을 만큼 무지했어요. 얘가 왜 여기 왔나 하는 분위기였죠."
2000년대 들어서는 상황이 달라졌다. "한국이든 유럽이나 미국이든 서로에 대한 정보가 넘치는 거예요. 다 안다는 사람들이 많아져 예전에 겪지 않은 피곤함이 생겼어요." 그가 병적으로 싫어하는 게 왜곡이다. "내 작업의 진실이 왜곡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러면 왜 작가를 하겠어요. 징그러운 작업하면 징그럽게 봐주고, 평화롭게 한 작업은 그렇게 봐달라는 겁니다. 이해 못했는데 이해한 척하는 게 싫어요."
사실 그의 작품에 대해 난해하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전문가 평가와 일반인들 간 차이를 좁혀갈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일반인이 양혜규라는 작가를 알고 싶을 때 찾아가고 싶은 길이 잘 닦여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연히 조금 알고 싶을 때 찾아보면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이죠."
좋은 작가가 되기 위해 그는 한걸음 한걸음 신중하게 걷는 편이다. "진실성이 없으면 성공하기 어려워요. 중국 같은 큰 나라가 아니고 국가 단위로 한국을 조명하기에는 한국은 정말 작은 나라죠. 뛰어남은 기본이고 진실성 없이는 국제무대에서 호소력이 떨어져요. 이것이 오히려 한국 예술가에게는 좋은 환경이죠."
[이향휘 기자]
⑬ 英 무대서 활약, 태너 박지민 ◆
테너 박지민 英 무대서 활약
"오디션 190번 떨어지며 오기 키웠죠"
세계 3대 오페라극장 코벤트가든 무대에 초청"나는 어떤 배역도 소화할 수 있는 오페라가수"

지난 19일 매일경제신문사를 찾은 테너 박지민 씨는 "유학 시절 케밥과 라면으로 연명했지만 노래를 부를 때는 행복했다"고 말하며 활짝 웃었다. <이충우 기자>
2005년 겨울부터 이듬해 엄동설한까지 무려 190번이나 유럽 오페라극장들의 오디션에서 떨어졌다. 결혼식 축가를 불러 모은 유학 자금 3400만원도 바닥났다. 돈을 아끼기 위해 10시간 동안 저가 항공기와 기차를 갈아타고 오스트리아 빈에서 독일 캠리츠 오페라극장으로 오디션을 보러 갔다. 단 두 소절을 불렀을 때 극장 감독은 "우리가 찾는 목소리가 아니야"라고 차갑게 거절했다.
테너 박지민 씨(33)는 숙박비를 아끼려고 비행기 대합실에서 자고 다음날 벨기에 극장에서 오디션을 봤는데 또 떨어졌다.
처량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는 매일경제신문사 빌딩 로비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웃었다. 환하고 경쾌한 소리였다. 그 긍정의 힘이 인생 역전을 일궈냈다. 그는 수많은 실패를 딛고 세계 3대 오페라극장인 영국 로열오페라하우스(코벤트가든) 무대의 주인공이 됐다. 세계 최대 클래식 매니지먼트 회사인 아스코나스홀트의 전속가수가 되는 영광도 누렸다.
그는 실패를 철저하게 분석해 성공의 디딤돌로 삼았다. 창피함을 무릅쓰고 극장 관계자들을 찾아다니며 오디션에서 탈락한 원인을 물었다. 대부분 그의 목소리에 한 가지 색깔밖에 없다는 게 이유였다.
박씨는 "오페라극장에서는 다양한 역할을 원하니까 작곡가 푸치니나 베르디 오페라 전문 가수는 필요 없는 거죠"라며 "그 순간부터 다양한 목소리를 내기 위해 유명 성악가들의 노래를 연구했어요"라고 말했다.
모차르트와 로시니 오페라 전문가인 테너 루이지 알바의 노래를 모창하고, 도니제티 오페라를 잘 부른 루치아노 파바로티의 음반을 분석했다. 숨을 어떻게 쉬는지, 목을 어떻게 쓰는지 철저하게 연구했다. 밥 먹고 노래만 부르니 다양한 음색이 가능해졌다. 자신감이 생긴 그의 오디션 대응법도 달랐다. 극장 관계자들에게 "무슨 노래를 듣고 싶나요, 당신이 원하는 것은 뭐든 다 부를 수 있으니 골라봐요"라고 말했다.
얼마 후 그 당찬 노력이 효력을 발휘했다.2006년 겨울 독일 겔젠 키리헤 오페라극장 오디션에 합격했다. 그해 11월 이탈리아 비오티 콩쿠르 심사위원이었던 극장장이 그를 눈여겨보고 부른 것. 그런데 행운이 겹쳤다. 코벤트가든의 젊은 성악가 육성 프로그램인 `제트 파커 영 아티스트`로도 선정됐다. 안정된 월급이 보장되는 키리헤 오페라극장 전속 가수와 큰 무대에서 배울 수 있는 코벤트가든 견습생 사이에서 고민했다.
답답한 마음에 강병운 서울대 음대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강 교수는 "네가 뭔데 벌써 주인공을 하니, 밑바닥부터 다시 배워라"고 따끔하게 충고했다. 코벤트가든에서 박씨는 `문제아`였다. 첫 공연인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단역을 맡았을 때 지휘자는 그에게 지휘봉을 던지며 "노래 뜻은 알고 부르냐"며 화를 냈다.
"다른 출연자들은 가만히 있게 하고 저 혼자 노래하고 움직이라더군요. 시키는 대로 노래와 동작을 수없이 반복하다보니 집에 가고 싶어지데요. 보다 못한 소프라노 안나 넵트렙코가 제 볼을 딱 잡더니 `너같이 연기 잘하는 성악가는 처음 봐`라고 속삭여줬어요. 세계적인 소프라노가 그런 말을 해주니 정말 힘이 났죠."
그날 함께 공연했던 세계적인 바리톤 드리트리 흐보로스톱스키는 아스코나스홀트 오디션에 참석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
"190번의 오디션에서 실패하면서 터득한 다양한 음색을 마음껏 보여줬어요. 어떤 배역도 소화할 수 있는 제 가능성을 보고 계약을 체결했죠."
감기에 걸려도 무대에 올랐다는 박씨는 8년 후 노래로 불우이웃을 돕는 자선사업가가 되고 싶다고 했다.
<시리즈 끝>
[전지현 기자 / 사진 = 이충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