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자료

매경춘추

길벗 道伴 2013. 9. 7. 14:03

*. 해금(海禁)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의 역사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다양한 시공간에서 복잡한 인과관계의 상호작용을 거쳐 나온 산물이다. 세계사를 배우는 이유는 역사의 큰 흐름을 반추하며 오늘날 우리 문제의 맥락을 이해하고 같은 오류를 반복하지 않도록 하자는 것이다.

근대 이후 유럽과 아시아의 발전의 역사를 대비하는데 `해금`(海禁)이라는 말만큼 적합한 단어도 없을 것이다.

명나라 태조 주원장은 신왕조 건립 직후인 1371년에 "한 조각의 판자라도 바다에 떨어뜨리는 것을 불허한다"는 강력한 `해금령`을 시행했다. 조선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섬사람들이 외적과 연계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섬에 사람이 살지 않고 비워두는 공도(空島)정책까지 시행했다.

아시아는 강력한 `해금`으로 바다로 진출하려는 의지를 막고 해외무역을 제한함으로써 자급자족의 폐쇄적 경제체제가 됐다. 바다는 교류와 무역을 위한 개방적 공간이 아니었고 대외관계를 가로막는 장애였다. 바다는 외적이 쉽게 침입할 수 있는 안보취약 지역이었고 바닷가 사람들은 적과 내통할 수 있는 불온세력으로 통제의 대상이었다. 농업을 본업(本業)으로 삼는 유교적 세계관에서 바다 일은 말업(末業)이자 천업(賤業)이었다.

`바다에 갇혀` 버린 채 해상무역으로 문명의 교류와 부를 창출하는 세계사의 큰 흐름에서 뒤처지게 된 것이다. 이것이 근대 유럽 해양세력에 의해 식민의 역사를 겪게 되는 아시아의 굴욕이 시작되는 분기점이었다.

실제로 유럽이 근대 이후의 세계사를 주도할 수 있었던 기반은 단연코 `대항해 시대`라 불리는 과감한 해양진출의 역사 때문이었다. 포르투갈ㆍ스페인을 선두로 한 유럽국가들은 자원이 부족하고 대륙에 막힌 지리적 불리함에서 탈피해 과감히 대서양 너머 대륙 저편으로 눈을 돌렸다.



해상무역으로 벌어들인 경제적 이득은 유럽 사회 전반에 큰 변화와 발전을 가져왔고 문화 부흥과 자본주의가 꽃피울 수 있게 했다.

장기간 항해에 필요한 선박 건조와 항해 장비의 개발은 조선ㆍ기계ㆍ천문ㆍ해양기술의 발전과 연관 산업의 성장을 가져왔다. `해금`은 오늘날 바다의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바다에서 새로운 활로를 찾는 이때 왜 우리가 더 과감히 바다로 눈을 돌려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주는 역사가 아닐까 한다.

[김석균 해양경찰청장]

 

 

*.`들을` 청(聽)

커뮤니케이션의 어원은 라틴어로 `나눈다, 공유한다`를 뜻하는 커뮤니케어(communicare)에서 왔다고 한다. 커뮤니케이션을 잘한다는 것은 언어나 비언어로 표현되는 생각이나 느낌을 나누고 공유하는 것에 능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집에서나 직장에서나 말하는 것과 듣는 것의 조화는 중요하다. 말은 잘하지만, 잘 들으려 하지 않거나 충분히 듣지 못하면 `절름발이 커뮤니케이션`이 되기 때문이다.

잘 말하고, 잘 듣기까지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두 가지를 조화롭게 하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호감을 받는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가능한 한 말하는 것과 듣는 것 간에 균형을 맞추려 나름 노력해왔지만, 요즘 이게 쉽지 않은 것 같다. 추진하는 정책에 대한 홍보와 이해를 구하는 일이 많아져 그런가 싶다.

얼마 전 부산에서 열린 `지식재산 토크 콘서트`에 참석했다. 150여 명의 청년 창업가, 대학생들과 함께 두 시간 정도 진행된 이 행사에서 필자는 평소보다 많은 이야기를 했다.

젊은이들이 아직 지식재산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니 좀 더 이야기를 해주어야겠다는 생각이 작용했던 것 같다.

행사 시간이 정해져 있고 바쁜 다음 일정 탓도 있지만, 이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다양하게 듣지 못했고 질문에 충분한 답을 해줄 수도 없었다.

토크 콘서트가 끝나고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그들에게 더 말할 시간을 주고, 필자는 더 듣는 시간을 가졌으면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경청은 상대방의 말과 제스처를 집중해서 들어줌으로써 말을 귀담아듣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사람에 따라 해석이 다를 수는 있지만, 이는 `들을 청`(聽)의 한자풀이로 가늠해볼 수 있다.

상대방의 말에 귀(耳)를 기울여 요지(壬)를 잘 파악하고, 열 개(十)의 눈(目)으로 상대를 집중해 바라보며, 상대와 마음(心)이 하나(一)가 되도록 한다. 한자 `관청 청`(廳)이 `집 엄()` 변에 `들을 청(聽)`인 것도 공직자는 잘 들어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필자는 올해 몇 차례 더 창업을 준비하는 대학생들과 만나는 시간을 가지려 한다. 이때는 말을 좀 줄이고 그들의 이야기를 더 듣고 귀 기울일 생각이다. 경청이 현장 소통의 시작과 끝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김영민 특허청장]

 

*.아름다운 죽도

경남 통영시 한산도 앞바다에 조그마한 섬 죽도가 있다.

주민 40여 가구가 사는 매우 한적한 곳이다. 한때는 초등학교 분교도 있었으나 젊은이들이 떠나고 아기들 울음소리도 그쳐 몇 년 전에 분교도 폐교됐다. 이를 리모델링하여 `재기 중소기업개발원`을 세웠는데 전국의 실패한 중소기업 CEO들을 새롭게 교육시켜 기업의 패자부활전을 준비하는 곳이다.

우리나라 중소기업체 수는 약 12만개(5인 이상 제조업)가 넘지만 10년 기업이 드물 정도로 장수기업이 없어 다산다사의 구조적 취약성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의 경제활력은 새 일자리 창출과 청년실업 해소에서 찾아내야 하는데 과거 10여 년간 대기업은 고용이 줄고 중소기업은 늘려온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중소기업 대통령으로 자처하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은 새 일자리 창출에 가장 큰 정책의 우선순위를 두고 있다. 이를 감당할 수 있는 벤처기업이나 이노비즈기업 등 기술혁신형 기업을 중점 육성해서 돌파구를 찾고자 하는데 문제는 이들 기술기업이 의욕적으로 탄생했다가 채 5~10년도 못 버티고 쓰러져 버리는 현실이다.

필자는 꽤 괜찮은 중소기업들이 왜 이렇게 단명하는지를 알기 위해 오랫동안 지방 중소기업청장으로 근무하면서 현장을 파고들었다. 많은 대내외적 원인이 있겠으나 글로벌 환경에서 무한경쟁에 적응하지 못함이요, 때로는 연쇄부도나 보증책임으로 자기귀책사유 없이 회사를 접어야 하는 현실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일단 실패한 기업으로 낙인되면 금융거래는 중단되고 신용불량 등으로 모든 비즈니스 및 인간관계마저도 정지되어 버린다.

거래처는 물론이요 친구, 부모형제, 아내, 자식들과 대화가 끊기는 경우도 허다하다.

한국의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를 꿈꾸며 의욕적으로 출발한 우리의 젊은이들, 세계적 기술을 가졌던 전도유망했던 청년들이 사회에서 고립돼 버린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2년 전에 설립해 6기 수료생을 배출한 죽도의 재기 중소기업개발원에 가서 강의하고 밤새 토론하면서, 이 실패한 중소기업인의 뼈아픈 반성과 값진 경험 및 노하우야말로 향후 우리나라의 새로운 기업가정신의 활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게 됐다.

사회의 뒤안길에서 축 처진 어깨를 보듬어줄 실패 중소기업인의 새 희망의 보금자리 죽도개발원은 후박나무 앞으로 펼쳐진 남해의 쪽빛 바다만큼이나 아름답다.

[허범도 부산대 석좌교수]

 

 

*.노인들은 어디에?

불과 이삼십 년 동안 세상이 변해도 너무 변했다.

필자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만 해도 우리네 노인들은 마을의 어른이요, 존경과 공경의 대상이었고, 지혜의 상징이었다. 동네일은 물론이고 나라에 큰일이 생기면 원로들을 찾아 귀한 말씀을 들었다. 그런데 요즘 그 노인들은 어디에 있는가.

대부분의 노인들은 지공(지하철공짜) 스님이 되어 지하에 있거나 지상에 올라와도 경로당이나 탑골공원에 모여 앉아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나마 근력이 좀 나은 이들은 근처 산에 올라가 아래 세상을 하염없이 내려다보고 있을 따름이다. 도시의 커피숍이나 젊은이들이 많이 가는 식당에 가는 것을 삼간 지 오래고 맥줏집은 언감생심, 술 생각이 나면 동네 슈퍼 앞 파라솔이 고작이다.

세상에 미성년자 출입금지는 있어도 어른들의 출입을 금지하는 나라는 우리나라뿐이다. 노인들이 물을 흐린다고 하니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예술의전당 역시 개관 이후 25년이 되어 근근이 버티고 있는 서예박물관에나 가야 노인들을 만날 수 있고, 매일 발 디딜 수 없이 바쁜 음악당이나 오페라하우스에서는 노인들의 그림자조차 구경하기 힘들다.

지난봄 뉴욕 링컨센터에서 뉴욕필하모닉오케스트라 연주를 감상할 기회가 있었다. 그날의 감동은 연주보다 로비에 빽빽이 들어찬 관객들이었고, 그들의 70% 이상이 머리가 하얀 노인들이라는 것이었다. 우리나라 노인들은 더는 이대로 사회의 짐처럼 살아갈 수는 없다. 노인복지를 부르짖기 전에 우리 스스로 노년을 준비해야 한다. 그 우선이 건강이다. 100세 시대를 앞두고 40~50대부터 담배와 술을 끊고 운동해야 덜 아픈 노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더 중요한 건 돈이다. 돈이 있어야 괄시받지 않는 노년을 보낼 수 있다.

퇴직금 받았다고 덜컥 경험도 없이 가게를 차리고 일 년도 되지 않아 홀라당 들어먹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 주위를 살펴보면 젊은이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자리도 수월찮다. 자식들 결혼한다고 거창한 혼수해주는 짓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



공부시켜 줬으니 집이니 자동차니 하는 것은 자식들이 알아서 장만하라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앞으로 우리가 살날이 점점 길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노인들이 사회의 짐이 아니라 그때 그 시절처럼 당당한 어른으로 함께 살아가는 날이 꼭 다시 돌아올 것이다.

[고학찬 예술의전당 사장

 

 

 

*.춘추와 연륜

누군가의 나이를 물어볼 때, 상대에 따라 사용하는 용어가 달라진다. "몇 살이니?"부터 "나이가 어떻게 되지?" "어르신 연세가 어떻게 되시나요?" 등. 다양한 예사말과 높임말이 사용된다. 그런데 어느 정도 이상이 되면 나이를 묻는 용어 중에 춘추라는 말이 등장하게 된다. "춘추가 어떻게 되시나요?"라는 표현은 일반적으로 나이를 묻는 용어와는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연륜` 과 `경험`이 느껴질 때 나이를 쉽게 묻지 않고 `춘추`라는 말을 쓰곤 한다. 사전적 의미에서의 춘추는 `어른의 나이를 높여 이르는 말`이다. 또한 한 해 두 해가 간다고 할 때의 `해`의 의미이기도 하다. 이렇듯 만물이 생동하는 봄과 수확과 결실을 의미하는 추수의 가을의 의미를 반복하면 세월, 역사라는 말로 다시 표현되고 여기에 오랜 세월 동안 어떤 일정한 포부와 계획을 가지고 노력한 흔적을 우리는 `경륜`이라고 부른다.

잔잔한 바다에 배가 순항할 때는 일반적인 항법대로 운항하면 된다. 하지만 거센 폭풍우를 만나면 풍부한 경험과 노련함으로 폭풍우를 헤쳐나갈 유능한 선장이 필요하다. 많은 경험과 전문성을 가진 사람은 우리를 어려운 위기상황에서 적절한 타이밍에 위기를 극복하고 성공으로 이끄는 방법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나이`를 `춘추`라고 불러야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우리는 그저 세월이 흘러 나이만 든 사람을 `춘추`라는 말을 사용하기보다는 남들보다 노력한 땀방울이 오랜 경험으로 축적되어 어느 간 덕망가, 전문가로서 존경받는 자리에 오른 사람들에게 사용하기 마련이다.

어린 시절 방과 후에도 정미소를 하며 쌀가마를 세시던 부모님 옆에서 장부를 적고 계산기를 두드렸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 필자가 한 일은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일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재미로 한 수고와 노력이었고 오늘의 내가 있게 한 원동력이기도 하다. 일상에 안주하지 않는 끊임없는 노력과 땀이 훗날 자신의 세월과 역사가 될 것이다.

그때 필자에게 "올해 춘추가 어떻냐?" 묻는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우리 주변에서 나이와 상관없이 "춘추가 어떻게 되십니까?" 하고 묻고 대답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남다른 노력과 헌신으로 우리 사회와 이웃에 사랑과 행복을 안겨주는 분들이 더욱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에서 하는 말이다.

[박혜린 옴니시스템(주)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