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
인생주고 받는" 핑퐁"
길벗 道伴
2005. 9. 26. 11:03
[세상 사는 이야기] 인생은 주고 받는 '핑퐁' | |||||||
긴박하면서도 리듬이 있다. 그 리듬이란 게 또 독특하다는 생각이 든다. 치열하게 메달을 다투는 적과 함께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탁구는 '상대적'인 게임이다. 나만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늘 피드백을 생각해야 한다. 탁구기법 중 하나인 '커트'를 보자. 가볍게 볼 아래를 깎아 보내는 커트로 상대방 을 공략할 때는 으레 드라이브나 커트 반격을 예상해야 하는 것이다. 0.1초도 안되 는 짧은 순간 뇌리에 수십 가지 생각이 교차한다. 이것이 2.7g, 지름 40㎜ 정도의 가벼운 공을 30여 년간 주고받으며 느낀 탁구에 대한 단상이다. 탁구인들이 상대를 잘 배려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나쁘게 말하면 영악하다고 해야 할까. 선수촌에서야 '작은 공만큼이나 속이 좁다'며 놀림을 받지만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이런 '비아냥 스매싱'에 나의 '리턴'은 늘 구석을 찌른다. 탁구는 섬세하고 감각적 이다. 머리 회전이 빠르고 영리해야 한다.
험한 세상에서 제대로 살아 남으려면 이런 '탁구식 사고'가 필수다. 늘 계획하거나 행동할 때는 리턴을 생각할 것. 수싸움에서 앞서야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는 법이다. 좀 계산적이지 않냐고? 요즘처럼 빠르게 흘러가는 정보화 시대에는 일견 찬바람 쌩 쌩 나는 이런 탁구(핑퐁)식 사고가 대인관계를 원만히 유지하는 핵심이 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온라인의 메신저다. 글자 수는 많아야 10자 남짓, 걸리는 시간도 길 어야 1~2초다. 짧은 호흡으로 순간적으로 주고받으니 '온라인 탁구 대화'나 다름없 다. 요즘은 이 메신저로 온라인을 통해 무역도 한다. 짧은 찰나에 상대방 머릿속 생각 을 간파해야 하는 것이다. 탁구식 사고는 온라인 세계에서는 필요조건이 돼 버린 셈이다. 국제대회나 올림픽을 준비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철저히 돌아올 것을 계산해내야 한다. 내가 즉흥적인 '벼락치기'를 경계하는 것은 이런 맥락이다. 벼락치기 때는 리턴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탁구로 치면 어떤 구질의 공이 들어올지 계산이 안 된다는 얘 기다. 이런 식이라면 결과는 늘 참혹할 수밖에 없다. 지난해 아테네올림픽 때 에피소드 하나. 당시 탁구대표팀 감독을 맡고 있던 나는 이미 대회 직전까지 선수들의 연습패턴에 대한 '리턴'을 계산에 넣고 있었다. 내가 누군가. 유승민도 울고 갈 '사라예보의 탁구 전설' 이에리사가 아닌가. 큰 대 회를 앞둔 선수들 마음이라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바로 나다. 전국탁구종합대회 7연패. 아직도 깨지지 않은 기록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매일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강훈을 시켰던 나는 올림픽이 열리기 보름 전 돌연 3박4일 여행을 떠났다. 선수단은 난리가 났다. 메달을 획득해야 한다는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이에리사 감 독이 결국 이상해진 것 아니냐는 둥 갖은 비난이 쏟아졌다.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 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웬걸. 오전에 가볍게 2시간 몸을 푼 뒤 종일 물놀이와 맛있는 식사로 가득 채워진 3박4일의 '기습 휴가'를 보낸 선수들이 하나둘 내뜻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경기는 흐름이다. 특히 올림픽처럼 큰 대회는 더욱 그렇다. 경기 직전 짓누르는 메 달 중압감에서 벗어나는 것이 제 기량을 발휘하는 지름길이다. 긴장 속에서 여유를 찾아야 하고 여유 속에서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감독님이 이상하다"는 수군거림은 "역시 감독님 최고"라는 칭찬으로 하나둘 변해 갔다. 하지만 시기는 시기인 것. 올림픽까지 남은 기간은 불과 2주. 마음은 급해질 수밖 에 없다. 상황이 이러니 오전 2시간 몸풀기가 애절해 질 수밖에. 사실 그 2시간은 선수촌에서 5시간 이상의 집중훈련 효과가 있었을 게 틀림없다. 지금도 선수들은 나만 보면 꿀맛 같던 당시의 강릉 휴가 얘기를 하곤 한다. 물론 '깜짝 이벤트'로 비치긴 했지만 이는 짧은 기간 합숙을 통해 선수들 기량을 최고점으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계산을 밑바탕에 둔 탁구식 사고에서 나온 것이다. 삶은 상대적인 것이다. 하루에도 수많은 관계를 맺고 또 넓혀 간다. 선수촌장 자리에 앉고 보니 삶이 상대적이라는 생각이 더욱 절실하게 와닿는다. 항상 타인과의 관계 속에 인생행로가 엮어짐을 더욱 실감한다. 나의 행동 하나하나가 선수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다. 말 한마디도 그냥 내뱉어 서는 안 된다. 행동에 나서기 전에도 나의 행동을 보고 되돌아올 '리턴'에 대해 더 욱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게 되는 것이다. 현역시절 요긴하게 써먹던 나만의 서브가 있었다. 볼의 오른쪽을 깎아 돌려서 회전 을 주는 구질인데 상대방의 라켓에 닿으면 정확히 내가 때리기 좋은 방향으로 되돌 아온다. 충분히 상대방을 배려한 뒤 행동해야 좋은 관계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인생사의 진 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직책이 높아지고 월급을 더 받는다는 것은 그만큼 책임 범위가 넓어지는 것을 의미 한다. 대회에 나가 메달을 따지 못하는 것은 제3의 요인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자기 책 임이다. 연습량이 모자랐든 연습방향이 잘못됐든 자신의 행동이 되돌아온(리턴) 결 과다. 모든 것을 내 탓으로 돌릴 줄 아는 책임있는 사고에서 제대로 된 탁구식 사고가 나 온다. 탁구공처럼 부드럽고 둥근 삶을 사는 것은 결국 어떤 리턴을 예상하고 적중시키느 냐에 달려있는 게 아닐까. [이에리사(태릉선수촌장)] < Copyright ⓒ 매일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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