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남은 마치 노래 부르듯 기자를 맞았다.
"뭐 마실래, 커피? 타 먹어." 통에서 설탕, 프림, 커피를 덜 때 웃음이 씩 나왔다. `과연 조영남이다.` 그는 인터뷰라는 형식에 구애받지 않았다. 첫 만남이지만 오랜 친구를 대하듯 했다. 열심히 답변을 하면서도 `또각, 또각` 손톱을 손질했고, 작곡에 열중한 베토벤의 일그러진 표정으로 원고를 썼고, 여섯 살짜리 꼬마 손님이 방문하자 "이야~"하면서 타잔처럼 달려나갔다. 때론 고뇌에 빠진 파우스트처럼 허공을 응시하기도 했다.
`일본 파동`(그의 표현으로) 이후 9개월여 만인 지난달 29일 KBS 1TV <열린 음악회>에 출연하며 겨우 사면된 조영남(62)의 모습은 오히려 밝아 보였다. 화실을 겸해 쓰는 청담동 집은 옛날 사랑방처럼 이 사람 저 사람으로 복작거렸다. 조영남을 상징하는 화투와 태극기 그림도 여전히 벽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지난 아홉 달 동안 어땠냐고? 귀양살이였지. 그런데 사람들은 내가 환희에 젖어 있는 걸 이해 못하더라고."
이게 웬 뚱딴지 같은 소리일까.

기타 처음 만져 본 중학생 시절 이거 쳐서 먹고 살게 될 줄은…
① 1952년 무렵 서울 성북동 작은아버지 집에서 가족과 함께 찍었다. 피난 와 충청도로 내려가기 전 시절이다. 그는 황해도 남천 태생이다. 간직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사진이기도 하다. 왼쪽부터 형, 조영남, 동생, 아버지(직업 목수)와 어머니, 누나.
② 중학생(충청도 삽교중학교) 때 처음으로 기타를 만져 보고 폼을 잡고 있는 사진. 동네 아저씨의 기타를 빌려 `똥 누러 갔다/오줌 누러 갔다/똥통에 빠졌다 ~`라는 당시에 유행하던 노랫말을 불렀다. "아주 신기하기는 했지만 이거 쳐서 먹고 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라고 설명한다.
③ 1980년대 초 MBC TV `몰래 카메라` 코너가 기획한 가짜 자선 마라톤 대회(여의도)에서 속아서 뛰고 있는 모습. 땡볕 속에서 역주하는 폼이 애처로우면서도 재미있다. 제작진은 잠깐 뛰면 된다고 안심시켜 출전시킨 후 동료 출연자들과 짜고 조영남을 1등으로 들어오게 만들었다. 조영남 뒤로 김흥국.홍수철.황기순 등이 보인다. 당시 큰 화제가 된 장면이다.
④ 1995년 교보문고가 마련한 `백남준과의 미술 토론회`에서 최근 타계한 고 백남준과 처음 만났다. 이후로도 두세 번 교제를 가졌다. 백남준이 엄청난 지식의 소유자로 동서고금의 철학을 꿰뚫고 있어 놀랐고, 자신을 먼저 알고 있어 또 한번 놀랐다고 한다.
이장희 살고 있는 울릉도 가보니 내가 있는 이 곳이 바로 '유토피아'
■유토피아는 없다
친일 발언과 신사 참배 여부에 관한 그의 생각은 생략하도록 하겠다. 그는 사죄하고자 하지도, 해명하고자 하지도 않았다. 일본 <산케이 신문>과 한 인터뷰 기사가 나가고 자신이 진행하던 KBS 1TV <체험 삶의 현장>에서 중도 하차한 4월 이후 어떤 체험을 했던 것일까.
"일본 파동이 일어나니 모두들 `조영남, 나쁜 놈` 하는 것 같았다. 정몽헌, 안상영 씨가 왜 자살했는지 알 듯싶다. 사면초가니까. 절친한 선배 신성일 씨가 5년형을 선고받은 게 내 일본 파동 이틀 후였다. 여기서 도저히 하루도 못 견딜 것 같았다."
그는 프랑스행을 고려했다. 그러나 도망자 같은 기분으로 가면 남들이 도망자로 볼 건 불 보듯 뻔한 이치였다. 시간은 흘러갔다. 그때 마침 가장 친한 후배 이장희가 울릉도에서 찾아왔다. 일찌감치 방송을 그만두고 2년 전 울릉도로 들어간 이장희는 집을 사고 더덕밭을 가꾸고 있었다. 이상향을 찾아간 것이다. 이장희처럼 울릉도에서 가서 더덕밭 가꾸고 농사 지으면 그것이 유토피아일 것 같았다. 그런데 후배는 엉뚱한 대답을 내놓았다.
"형, 유토피아는 없는 것 같아."
"무슨 소리야."
"울릉도가 무슨 유토피아야? 허리가 끊어지는데."
울릉도에 대한 애착과 별개로 농부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일러 주는 말이었다. 충격을 받은 조영남은 8월 말 서둘러 4박 5일 일정으로 울릉도로 향했다.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이장희의 더덕밭에 도착해 보니 잡초만 무성하게 우거져 있었다.
"유토피아란 없다."
번개가 하늘에서 머리로 내리꽂히는 것 같았다. "거기서 구원을 받았다.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이야기다. 인간들이 지금 자신이 유토피아에 있는 걸 모른다. `나는 왜 요 모양 요 꼴이지`라고 생각하는데 그건 아니다. 나는 더 이상 철학책 볼 것도 없다. 다 물어 보라. 체험 이상 없다."

■젊은 여자들한테 늙은이로 보이면 끝장
"두 번 결혼하고 두 번 이혼한 것이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다"라고 세간을 떠들썩하게 한 가정사로 이야기를 돌릴 때, 그는 일말의 흥분마저 걷어 내고 갑자기 푹신한 의자 등받이로 몸을 젖혔다. 그리고 허공을 보며 깊이 생각에 잠겼다.
"그 체험에 의해 혼자 사는 게 편하다는 생각을 했다. 쾌적하고 편하다는 결론 끝에 12년 동안 혼자 살았다. 잘한 일은 딸(은지) 하나 입양한 것이다. 그걸 통해 내가 운이 좋다는 걸 알았다. 나는 아티스트이기 때문에 선천적으로 냉혈한이자 이기주의자라고 여겨 왔지만 딸을 통해 내 속에 무한대로 사랑의 잠재력이 있다는 걸 알았다. 거기서 스스로 위로를 찾는다."
그는 첫 부인과 헤어짐을 무척 아쉬워하는 듯했다. "첫 부인이 애들(두 아이)을 무척 잘 키웠다. 내가 바람피운 게 이혼의 원인이 됐다. 자백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자백하면 구원 받을 줄 알았다. 큰 차질을 빚었다. 나는 그냥 `사랑방 남자`로 아버지 노릇하고, 가장의 홀(笏)만 쥐겠다고 했는데 사랑방도 안된다는 거였다. 그래서 나왔다."
두 번째 결혼과 이혼 이야기에는 비교적 담담했다. "3~4년쯤 살고 나니 이 여자가 애를 낳고 싶다고 했다. 나는 배 다른 자식을 만들기 싫었다. 서로 의견차를 좁히지 못했다. 내가 해결책을 냈다. `네가 아직 예쁘니 미국으로 연수를 가라. 거기서 남자를 만나라`고 했더니 2년쯤 뒤에 남자가 생겼다. `내가 선을 봐 주마. 둘이 잘 살아라` 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는 12년 독신생활을 아슬아슬한 줄타기에 비유했다. "늙은이답게 사는 것을 연구하는 중이다. 늙은이답게 살면서도 젊은 여자들한테 늙은이로 보이지 않아야 하는 게 제일 힘들다. 가장 힘든 공부다. 여기서 탈락하면 어려워지는 거다. 지금까진 잘해 왔다. 열여덟 살 내 딸, 그 친구들과도 치열하게 대화한다. 대여섯 살 아이들도 나를 찾아야 하고. 아직도 `오빠`, `아저씨`, `친구`가 되는, 그런 관계를 느슨하지 않게 하고 있다."
■고정 방송? NO!
`9개월의 귀양살이`는 울릉도 사건을 겪으며 초반과 전혀 다른 모양이 됐다. 그는 현자 톨스토이처럼 말했다. "그게 나에게 막판 뒤집기(전화위복)가 됐다. 바쁘게 살다 죽을 뻔했는데 이 사건 때문에 내가 택한 삶 이 최선이 아니었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고정 방송 2개, 신문 칼럼 2개, 전시회, 음악회, 해외 전시까지 하니 내 삶이 아니었다. 누굴 만나 사람답게 눈빛 을 마주치며 대화한 적이 없었다. 바쁘니까. 내 삶이 깊이 곪아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바람직하지 않은 삶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그래서 그는 '전푼협'(전국 푼수자 협의회) 회장과 '재수회'(재수 있는 사람들의 모임) 명예 교주가 됐 다. 그를 중심으로 살롱 문화의 꽃이 피어났다. 그림 도 열심히 그리고, 얼마 전에도 정운찬 서울대 총장 등과 함께 대학로를 돌아다니며 자유롭게 공연들을 즐겼다. 이렇게 좋은 걸 포기할 이유가 없다는 표정이다. "내 논리는 사람은 시련을 겪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해를 해서라도 시련을 만들어야 한다. 사람들이 내 입에서 살려 달라는 소리를 듣고 싶었는데 정반대이 니 의아해한다. 나는 과연 정박아인가. 이번 파동을 통해 내가 굉장한 놈이라는 걸 실감했다. 내 자신을 그만한 인물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가수가 광대니까 한마디 한 건데, 광대로 안 봐 주니. 주변에선 내가 대단한 인물임을 깨닫고 환희에 젖는 걸 이해 못하고 있다." 고정 방송 출연은 절대 사절이다. "앞으로 계획 없 이 살겠다. 되는 대로 살면 된다. 다음달 전주 소리마 당에서 대규모 전시회, 4월 LA에서 패티김·이미자와 함께 '3인 빅쇼', 5월 어버이 콘서트, 9월 뉴욕 전시 회 등만 해도 정신없다." 9개월 만에 사면돼 <열린 음악회>에서 본 소감 역시 '조영남'다웠다. "노래 부르기에 내가 너무 늙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좋아하더라고."
"예술은 사기다" 라는 백남준 말…나이 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이야기
조영남은 고 백남준을 독특하게 해석했다. "예술은 사기다"라는 백남준의 말이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당시 백남준을 현대 예술계의 예언자이자 구원자라 생각했다. `예술은 사기다`라는 말은 `모든 것이 예술이다. 삶 자체가 예술이다`라는 뜻이다. 내겐 하늘 같았다. 그때 그분이 한 말은 나이 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내가 지금 그런 소릴 하고 다니니까. 지금은 이 말에 떨림이 없다. 단, 그분이 그때 처음으로 말했다는 게 중요할 뿐이다. 아무도 그런 말 못할 때."
백남준과 여자를 보는 시각도 대비시켰다. "나는 날씬한 여자를 좋아하는데, 백남준은 뚱뚱한 사람을 좋아했다. 그 사람은 근본주의자(자연미를 사랑하는)이고, 나는 가공을 즐기는 테크니션이라고 볼 수 있다. 가공에 신경 안 쓰니까 더욱 광범위한 것을 창조해 낼 수 있던 것이고, 나는 한정을 짓기 때문에 협소해졌다."
그러나 백남준이 분명 자신을 부러워했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백 선생도 실은 나처럼 살길 원하지 않았을까. 백 선생이 예쁜 여자까지 끼고 살았으면 세상살이가 무지하게 짜증났을 거다."
글=장상용 기자 <enisei@ilgan.co.kr>
사진=이호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