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인드

공부를 준비할 필요는 없다 .

길벗 道伴 2013. 5. 16. 11:15

 

[고병권의 시민의 철학] 공부를 준비할 필요는 없다
                                          공부를 준비할 필요는 없다
 
수영을 배우려면 물에 들어가서 헤엄을 쳐봐야 한다.
수영법을 마스터하는 게 우선이 아니다.
 공부란 자신이 가진 미약한 것에서 시작해 계속해서 앎을 생산하고 더 나아가는 것이지,
무슨 방법을 알면 단번에 도달하는 게 아니다.
진리에 이르는 방법은 따로 없고 진리가 가는 길이 진리의 방법이다.
공부는 언제든 할 수 있고, 당연한 말이지만, 바로 시작함으로써만 시작되는 것이다.
주말이 되면 종종 딸의 손을 잡고 서점에 간다. 바닥에 함께 앉아 책 몇 권을 읽다 보면 정말 시간이 후딱 간다. '와, 신기하다', '정말 웃겨', '좀 이상하네' 등을 연발하며 딸은 계속해서 책을 뽑아오고, 나는 직원의 눈치를 슬슬 보면서 책을 읽어준다. 공짜로 많은 책을 읽기에 미안한 마음으로 책 한두 권을 계산대로 들고 나오다 보면 지나치게 되는 코너가 있다. 바로 청소년 코너다. 그곳의 많은 책장들은 형형색색의 학습참고서로 채워져 있고, 베스트셀러로 전시된 책들은 대개 무슨 무슨 '공부법'이다. 나는 언젠가 이 비참한 책의 세계, 즉 아무도 바닥에 털썩 앉아 책을 보지 않는 곳, 무슨 주술에라도 걸린 듯 책에 머리를 처박고 낄낄대거나 눈시울을 붉히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는 이곳에 대해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조금 다른 것이다. 공부하는 수십만 명의 학생들이 사서 본다는 ‘공부법’이라는 책들. 나는 그것들을 읽어보지 않아서 무슨 내용이 안에 들어 있는지 모른다. 다만 그 제목이 내게 뭔가를 생각하게 한다. 그 책들은 마치 ‘당신 공부가 안되는 이유는 공부하는 방법을 몰라서다’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러니까 먼저 방법을 알아야 공부가 된다는 것인데, 이와 관련된 하나의 철학 논쟁이 떠오른다.


먼저 방법을 알아야 공부가 되는 것일까?

공부의 사전준비를 강조한 데카르트
철학도 하나의 공부인 한에서 별도의 ‘방법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진리를 구하지만, 그 방법을 모른다면 그 공부란 헛된 수고가 아닐까?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했던, 그 유명한 철학자 데카르트도 그랬다. 그는 <정신지도를 위한 규칙들>이라는 책에서 이런 예를 들었다. 대장장이가 있다고 하자. 아마도 그는 곧바로 칼이나 투구, 다른 철제 제품들을 만들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그런 것들을 만들기 위해 망치와 모루, 집게 및 다른 도구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당장에 그런 도구들이 없다면, 자갈을 쓰고 나뭇가지를 써서 필요한 것을 만들겠지만, 어떻든 결국 칼이나 투구 등을 그것들로 만들 수는 없기에, 그는 먼저 망치, 모루, 집게 같은 것을 만드는 데 정성을 기울일 것이다.

데카르트는 자신이 말하려고 했던 바를 이렇게 정리했다. “우리가 최초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기예에 의해 획득된 것이라기보다는 우리 정신에 내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는 간단한 규칙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규칙들을 갖고 곧바로 철학의 쟁점을 판정하려 해서도, 또 수학의 어려움을 해결하려 해서도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진리 탐구에 더 긴급히 요구되는 것을 아주 열심히 찾는 일에 이 규칙들을 활용해야 한다.” 여기서 그가 '진리탐구에 더 긴급히 요구되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 바로 ‘방법’이다. 방법은 진리탐구를 위한 일종의 ‘사전준비’라고 할 수 있다.


데카르트

준비를 위한 준비는 불요하다고 주장한 스피노자
그런데 스피노자가 문제를 제기했다. 우리의 인식을 위해 어떤 방법이 먼저 필요하다면 그 방법을 알려면 또 어떤 방법이 필요하지 않을까? 방법을 아는 방법, 그리고 다시 방법을 아는 방법을 알기 위한 방법……. ‘진리탐구를 위해 사전에 요구되는 방법’이라는 생각을 하면 우리는 이런 무한 퇴행의 문제 제기를 받을 수밖에 없다. 스피노자는 <지성개선론>에서 데카르트를 겨냥하며 말했다. “금속을 연마하기 위해서는 모루가 필요한데 모루를 갖기 위해서는 이 모루가 만들어져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또 다른 모루 및 또 다른 도구들이 필요한데, 다시 이것들을 갖기 위해서는 다른 도구들이 필요하고, 이처럼 무한히 진행된다.”

정리하자면 데카르트는 진리를 얻기 위해 우리에게는 '모루'와 같은 '사전준비'가 반드시 필요하므로 그것을 얻는 데 주력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 준비 없이 곧바로 진리를 얻는 일에 착수해서는 안 된다고. 그에 대해 스피노자는 진리를 얻기 위한 어떤 사전 준비는 없다고 말한다. 준비는 그 '준비를 위한 준비'의 문제를 계속 제기할 것이고, 마치 공부를 한다며 연필만 깎고 있는 학생처럼, 인식은 지연되고 결국에는 회의주의자들처럼 우리는 인식할 수 없다고 말하게 될 것이다.


스피노자

공부와 공부법은 별개가 아니다
그러나 어떻든 사람들은 실제로 금속을 연마하고 사유를 한다. 논리상으로는 ‘방법을 위한 방법’, ‘준비를 위한 준비’라는 문제 때문에 인식할 수 없다는 사람들은 실제로 인식을 한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우리의 논리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바로 ‘방법 ’이 ‘인식 ’의 선행 조건이라고 생각한 것에 있다. 그런 생각 때문에 우리는 선행조건의 선행조건을 다시 생각해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스피노자식으로 말하자면 앎을 생산하기 위한 선행조건 같은 것은 없다. 방법이란 공부의 선행물이 아니라 공부의 결과물이다. 예컨대 수영법을 안 연 후에야 물에 들어가 수영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물에 들어가 조잡하게라도 수영을 시작한 후에야 우리는 수영법을 알게 된다. 사실 ‘수영법을 안다 ’는 말은 ‘수영을 할 수 있다 ’는 말일 따름이다. 그러니 ‘수영을 하는 것’과 ‘수영을 하는 방법 ’은 별도로 있는 게 아니다. 수영할 수 있는 한까지 우리는 또한 수영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셈이다.

조잡하게라도 수영을 시작한 후에야 우리는 수영법을 알게 된다.

공부란 길을 스스로 내면서 나아가는 것
데카르트가 든 예를 들어 스피노자의 생각을 풀어보자면 이렇다. 아마도 처음 공부를 시작하는 사람에게는 ‘모루’같이 세련된 것이 곧바로 주어져 있지 않을 것이다. 망치로 쓸 수 있는 것은 주변에 널린 자갈에 지나지 않았고 집게라고 하는 것은 그저 나뭇가지에 지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인식의 시작이고 공부의 시작이다. 우리가 그것들로 뭔가를 만들어내는 한에서 말이다. 그 다음에는 자갈을 서로 부딪쳐 불을 만들어내고 그것으로 청동을 뽑아내고 청동으로 철광석을 캐고 거기서 철을 만들고 나중에는 모루를 만들고 투구와 칼을 만들어낼 것이다. 투구와 칼을 만드는 데 필요한 '‘모루’는 청동 망치가 그렇고 나중에 투구와 칼이 그렇듯이 우리 앎의 과정에 있는 것일 뿐 무슨 절대적 사전 준비물이 아니다

내가 가진 것이 자갈과 나뭇가지뿐이어서 아직 공부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것은 공부를 늦추는 핑계일 수는 있어도 공부에 대한 참다운 인식은 아니다. 공부는 언제든 할 수 있고, 당연한 말이지만, 바로 시작함으로써만 시작되는 것이다. 공부란 자신이 가진 미약한 것에서 시작해 계속해서 앎을 생산하고 더 나아가는 것이지, 무슨 방법을 알면 단번에 도달하는 그런 게 아니다. 진리에 이르는 방법은 따로 없고 진리가 가는 길이 진리의 방법이다. 그리고 공부란 그 길을 스스로 내면서 나아가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