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자료

을(乙)을 위한 행진곡

길벗 道伴 2013. 6. 13. 22:08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렸던 `청춘예찬`. 멋진 운율과 화려한 수사에 취해 문장을 통째로 외웠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끓는 피에 뛰노는 심장. 그것이야말로 인류의 역사를 끌어온 동력이란 작가 민태원의 힘찬 외침.

청춘예찬에 이런 대목이 있다.

"이성은 투명하되 얼음과 같으며 지혜는 날카로우나 갑 속에 든 칼이다."

정말 그런 것 같다.

 동서양을 불문하고 인류의 진보를 가져온 중대한 사건들은 모두 머리가 아닌 가슴에서 나왔다.

 뜨거운 심장이 뿜어내는 웅대한 관현악은 차가운 머리가 빚어내는 이성과 지혜를 압도한다.

경제도 마찬가지다.

차가운 머리는 필요조건에 불과하다는 점을 최근 들불처럼 번지는 경제민주화 논쟁이 웅변적으로 말해준다.

사실을 열거하고 합리적 논거를 제시하는 저널리즘의 본령은 국민 정서를 등에 업은 인터넷 여론에 무기력하다.

 우리 사회의 모든 을(乙)들을 `만민공동회`란 이름으로 묶어내겠다는 민주당의 광주 선언이 깃발처럼 펄럭일 때 시장경제를 말하고 미래 경쟁력을 따지는 건 부질없다.
가진 자나 재벌을 위한 변론이라면 사회적 통념과 대중의 신념 체계가 용서하지 않는다.

 이성을 밟는 사회적 통념은 몰상식이며, 지혜를 좌절시키는 대중의 신념 체계는 맹신에 불과하다고 외친들 반향이 없다.

갑(甲)을 쥐어박는 수많은 법률들이 지금 여의도에서 논의되고 있다.

 대기업이 중소기업을 괴롭히면 정의란 이름으로 단죄하고, 본사가 대리점 위에 군림하면 공정이란 이름으로 두들긴다.

 괴롭히고 군림한다면 당연히 시정돼야 하고, 이 과정에서 법을 어겼다면 벌을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모든 것이 앞뒤 가리지 않고 도매금으로 넘어간다.

 납품단가를 깎는 건 괴롭히는 것이고, 가맹점 계약은 불공평하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이성과 합리성이 비집고 들어갈 여지가 없다.

누가 갑이고 누가 을인지조차 불분명할 때가 다반사인데 `갑=악` `을=선`이라는 이분법만 있을 뿐이다.

하도급법은 기본적으로 납품 업체 단가를 한 푼도 깎지 못하도록 개정됐다.

깎으면 정당한 사유를 대야 하고 그러지 못한다면 징벌적 과징금을 맞는다. `납품단가 후려치기`라는 표현 속에 이미 폭력이 숨겨져 있다.
계열사 간 내부거래도 죄악시한다.

 경제력 집중을 막기 위한 취지에서 공정거래법 개정안이 올라와 있다.

 삼성전자가 애플을 추격할 수 있었고,

현대자동차가 글로벌 자동차 기업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이유의 핵심이 수직계열화인데도 이에 대한 고려는 없다.

말로는 배려한다고 하나 기본적으론 `일감 몰아주기`로 매도한다.

기업 총수의 사익 편취 행위를 막기 위한 여러 장치가 있는데도 그 위에 특별한 법들을 덧씌운다.

경영상 해고를 어렵게 하고, 근로시간을 단축시키고,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을 노동조합이 대신 신청할 수 있는 노동법 개정안들이 논의된다. 선진국에서는 일반화돼 있는 사내하도급을 아예 불법 파견이라 간주하고 원사용주에게 연대책임을 묻자고 한다.

 무책임한 규제에 또 규제를 더한다.

이 모든 것들이 경제민주화로 포장된다.

 헌법 119조 2항을 말한다.

바로 앞(1항)에 있는 경제자유는 외면되고 할아버지뻘쯤 되는 재산권의 보장, 계약의 자유와 사적자치, 과잉금지의 원칙 같은 헌법정신은 완벽하게 무시된다.

암 수술을 한다고 정상적인 조직까지 제거하는 의료 행위이며, 연못에 해로운 물고기 한 마리를 잡기 위해 모든 물고기를 죽이는 독극물을 뿌리는 행위이며, 독 안에 든 쥐를 잡기 위해 독을 깨는 행위이다.

그래서 브레이크가 필요하다.

단언컨대 이런 경제민주화 입법으로 평화로운 사회를 설계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건 무지의 소치다.

그렇게 되면 국민은 행복할 것이라 믿는다면 그건 착각이다.

을을 위한 행진곡이 울려 퍼진다.

 난폭하고 격정적인 리듬을 타고. 대한민국을 어디로 끌고 갈지 가늠하기 힘든 변주가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