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자료

남과의 승부, 나와의 승부

길벗 道伴 2013. 7. 28. 17:40

남과의 승부, 나와의 승부

 

웹툰 `미생`의 영향력이 만만치 않다.

 착수, 선수, 미생과 같은 바둑 용어들이 인생의 주석이 된다. 지나온 길을 복기하는 기보나 그 기보의 해설이 인생과 연계된다.

판 하나로 압축된 삶이기에 갸륵하고 신기하다.

 바둑의 한 수는 두고 나면 결코 돌이킬 수 없다.

만화가 윤태호는 이렇게 말한다.

한 수, 한 수 매 번 선택을 강요당하는 바둑이야말로 인생 그 자체라고 말이다.

바둑에는 승과 패가 있다.

승패가 나뉘는 것을 두고 우리는 승부라 일컫는다.

애매모호한 결과는 없다.

무승부라 할지라도 결국 그것은 진 사람도 이긴 사람도 없이 끝났다는 의미다.

 `미생` 의 주인공은 사람들과의 만남 하나하나를 대국으로 여긴다.

 한 사람이 여러 사람과 나누는 대국이 곧 인생이 된다.

상대를 이기는 데 집중하는 것,

어쩌면 이게 바로 대국의 기본 수칙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내가 판을 짜고 내가 선수를 두고 내가 마지막까지 책임져야 하는 곳에서는 내가 곧 상대가 된다.

이때 가장 두려운 것은 바로 나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이다.

 질문을 던진 자가 나이니 대답을 아는 자도 나뿐이다.

내가 승부를 걸고 내가 성패를 결론짓는 세계, 세상엔 그런 승부도 있다.

세상이 바둑으로 상징될 수는 있지만 바둑이 곧 세상은 아니다.

아무리 그럴 듯해도 세상에서 겪게 될 선택이나 경우의 수가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게임은 패배를 기회비용으로 요구하지만 영원한 패배는 또 없다.

 하지만, 삶은 다르다.

세상사라는 게 대국처럼 단순하지가 않다.

사람들이 게임이나 승부에 집착하는 것은 그 편이 삶보다는 훨씬 단순하기 때문이다. 몇 년 동안 급속히 늘어난 오디션 프로그램의 속성도 바로 여기에 있다.

토너먼트식으로 구성되어 있는 오디션의 규칙은 의외로 간단하다.

 상대를 이기고 내가 먼저 승자의 자리에 오르면 되는 것이다.

게다가 오디션은 매우 특화되어 있다.

 노래를 잘하는 사람은 노래만 잘 불러도 되고, 춤을 잘 추는 사람은 춤만 열심히 연습하면 된다.

 학교생활처럼 모든 과목의 공부를 잘해야 하고 교우관계까지 신경쓰지 않아도 되며, 회사생활을 할 때처럼 회식까지 참여해 인성을 검증받을 필요도 없다.

 오디션은 경쟁과 승부라는 매우 간단한 규칙으로 이뤄진 게임과도 같다.

최소 규칙으로 운용되는 세상의 축소판인 셈이다.

사회생활의 가장 큰 어려움은 보험회사원이 계약만 잘 하고 백화점 판매원이 상품만 잘 설명하면 되는 것이 아닌 데서 시작된다.

사회생활의 승부에는 고려해야 할 상황이 너무 많다.

게다가 시간이 곧 승부의 결과를 말해주지도 않는다.

그런데, 나의 실패를 나만 알 수 있는 세계도 있다.

 나의 실패를 눈감는 순간 그 누구도 패배를 알 수 없는 세계, 소위 상대가 없는 게임에 임하는 사람들이 그렇다.

삶은 가혹하고도 다정해서 답이 없는 질문을 곧잘 던진다.

좋은 엄마가 되는 길에는 훌륭한 가수가 되는 것처럼 구체적 매뉴얼이 없다.

 내가 써 놓은 글이 승인지 패인지 알 수 있는 길도 없다.

 세상사의 평가가 있다지만 세상을 상대로 대국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프로는 자기 세계 안에서 스스로 승패를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내 안에서 도피와 염치, 자부와 주저를 구분해 낸다면 그게 바로 인생의 고수일 것이다.

하지만 내 안의 승부에서 사람들은 자꾸만 변명을 찾고 핑계를 덧붙인다.

자신을 설득할 당위 하나쯤은 늘 갖춰두고 산다.

내 안의 싸움은 피하고 밖에 놓인 단순한 룰에 매달리는 것,

 결국 인생이 승부라면 진짜 승부는 나 혼자만 아는 그곳에 있다.

[강유정 영화평론가ㆍ고려대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