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약점을 받아들이고 창조의 출발점으로 삼아라
시각장애인에 미술교육 펼치는 엄정순 `우리들의 눈` 갤러리 디렉터

자신의 약점을 고치려고 애를 쓰다 좌절한다.
예를 들어 상당수 직장인들은 내향적인 성격이 약점이라고 생각하고 이를 고치려 든다.
하지만 내향성의 상당 부분은 타고난 것.
아무리 애를 써도 고칠 수 없다. 고칠 수 없는 약점의 덫에 갇혀 허우적대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
그러나 남들이 보기엔 분명히 약점인데, 스스로는 약점이라고 느끼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고 새로운 창조의 출발점으로 삼는 사람들이다.
인상파 화가 모네가 그랬다.
그는 말년에 백내장으로 시력을 잃어갔다.
즐겨 그렸던 수련 그림에서 점점 수련은 형태를 잃어갔다.
더 이상 수련의 명확한 이미지를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신 모네는 수련의 추상적인 이미지와 물의 표면을 그렸다.
명확한 형태를 잃어간 그의 그림들은 현대 추상미술의 길을 텄다.
모네는 시력 상실을 약점이 아닌 자신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고 추상미술의 선구자가 됐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도 모네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시각장애인들은 세상을 못 보는 게 아니라 세상을 달리 보는 눈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들이 자신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을 표현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믿는다.
실제 외국에서는 시각장애인들이 화가ㆍ사진가 등으로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으며 활동하고 있다.
화가 엄정순 씨(52)는 97년 `우리들의 눈`을 창립해 시각장애인들에게 자신만의 눈으로 세상을 표현할 수 있게 지원하고 있다.
매일경제 MBA팀은 최근 서울 도화동 우리들의 눈 갤러리에서 엄 화가를 만났다.
그에게서 장애를 자신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고 창조의 출발점으로 삼는 시각장애인들 얘기를 들었다.
엄 화가는 "시각장애인도 일반인 못지않은 창조성이 있는데 사회적 편견 탓에 이를 발휘할 기회를 갖지 못하는 게 안타깝다"며 "장애를 장애로만 보지 않고, 약점을 약점으로만 보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밝혔다. 다음은 일문일답이다.
-시각장애인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시야가 아주 좁은 사람, 매우 가까운 곳의 움직임만 보이는 사람 등이다.
일반인들도 원시ㆍ사시ㆍ근시 등 다양한 눈이 있지 않은가.
시각장애인 눈도 모두 우리들의 눈이다.
그래서 우리 운동(시각장애인들에게 미술교육을 하고, 시각장애인의 미술품을 전시하는 활동)의 이름을 `우리들의 눈`이라고 했다.
영어로는 (다른 방식으로 보기라는 뜻인) `another way of seeing`이다. 우리들의 눈으로 각자 다르게 보는 것이니까.
-우리들의 눈 프로젝트를 시작한 계기는.
▶예술적인 동기가 가장 컸다.
화가로서 작업을 하면서 `본다는 게 과연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늘 갖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도쿄의 한 갤러리에서 시각장애인들 미술을 보았다. 마음속 질문에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
시각장애인들과 함께 미술 작업을 해도 되겠다`는 직관적인 끌림이 찾아왔다.
의사였던 아버님 영향도 있었던 것 같다.
아버님은 장애아동이 찾아오면 가장 먼저 치료를 해주셨다.
제게는 "너 대신 눈이 잘 안 보이고, 너 대신 귀가 아프니까 그러는 것이다. 다른 이유가 없다"고 하셨다.
그래서인지 장애 아동을 보면, 장애인으로 보는 게 아니라, 나와는 감각이 다른 인격체로 보게 됐다.
불쌍한 마음이 들어서 도와주어야겠다고 생각해 이 일을 시작하지는 않았다.
감상적인 동기가 아니라 예술적인 동기로 시작했기에 17년을 지속할 수 있었다.
-외부에서는 복지 활동으로 생각할 것만 같다.
▶저는 미술, 즉 인간의 창의성을 얘기하는데 밖에서는 사회봉사라는 시각으로 본다.
이게 가장 어려운 부분 중 하나다. 저는 시각장애인들과 함께 가는 것이다.
서로에게 배움이 되고, 새로운 창의력이 생길 수 있다.
이 일을 시작하면서 대학 교수를 그만두고 맹아학교에서 3년을 일했다.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헌신한다는) 큰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시각장애인들과 미술 작업을 하려면 먼저 이들이 어떤 환경에 있는지 알아야 했기 때문이다.
맹아학교에 지내면서 시각장애인들도 다양한 눈이 있고 충분히 미술을 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눈이 불편한 아이들에게는 일반인과 다른 창조성이 있나.
▶그렇게 미화하지는 않는다.
누구에게나 창조성이 있다.
시각장애인들과 미술 시간을 함께 하면서 절실히 느낀 점은 이들에게는 너무 기회가 없다는 것이다.
`시각장애인에게 미술은 필요 없다`는 편견이 너무 강하다.
기회가 없으니까 마치 못하는 것처럼 잘못 인식되는 것이다
. 이들에게는 너무나 큰 잠재력이 있다. 때로는 시력이 좋은 아이들을 넘어서는 창의력을 갖고 있다.
시각장애인들에게 이렇게 많은 이미지가 있었나며 놀라기도 했다.
-장애를 장애로 여기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할 것 같다.
▶그렇다. 장애를 장애로 보면 결핍으로 생각하게 된다.
다르게 본다면 또 다른 가능성을 찾을 수가 있다.
시각장애인들도 미술을 직접 해보기 전에는 가장 못하는 과목이라고 스스로 생각한다.
미술은 내 인생과 전혀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미술을 콤플렉스라고 여기기도 한다.
그러나 막상 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느낀다.
해볼 기회가 없었을 뿐이며 해보니까 `나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느낀다.
`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구나. 매우 재미있구나` 하는 반전의 경험을 하면서 삶의 지평이 넓어진다. 콤플렉스에서 자유로워지니까, 더욱 성장한다.
일반인이 하는 오해 중 하나가 `보이지 않으면 시각적 표현을 안 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인간은 죽을 때까지 자기를 표현하려는 욕구를 포기할 수가 없다.
-시각장애인 어린이들에게 코끼리를 만지게 하는 `장님 코끼리 만지기` 프로젝트를 했다고 들었다.
▶시각장애인은 미술을 할 수 없다는 편견에 도전이다,
잊지못할 좋은 추억을 만들어주고도 싶었다.
그냥 동물원을 방문하는 프로그램이 아니다. 미리 6개월 동안 미술 워크숍을 한다.
가장 작은 미술 단위인 점에서 시작해 지상에서 가장 큰 동물인 코끼리까지 사고를 확장하면서 표현 기법을 배운다.
코끼리에 대한 상상력을 심어준다.
그리고는 실제로 동물원을 방문한다.
코끼리를 만지고 냄새도 맡고, 점심도 먹으면서 나와 다른 생명체와 함께 하루를 지내는 것이다.
이런 경험을 조각 등 미술로 표현하고 전시까지 하는 것이 `장님 코끼리 프로젝트`다.
-프로젝트를 위해 태국까지 갔다고 들었다.
▶국내에서는 동물원 단 한 곳만이 우리를 받아줬다.
이곳 코끼리 기획사만 우리를 이해해 줬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동물원이 문을 닫았다.
아이들이 안전하게 코끼리와 지낼 수 있는 곳이 없어졌다.
그래서 태국 치앙마이의 코끼리 자연공원을 찾게 됐다.
이곳은 코끼리의 다친 몸뿐만 아니라, 인간에게서 얻은 정신적 트라우마를 치료한다.
-미술대학을 가고 싶은 시각장애인을 후원한다고 들었다.
▶한빛맹아학교 3학년 학생이 있다.
그 아이가 자기 목소리로 미대를 가고 싶다고 진심으로 원했다.
남들이 안 된다고 하는 것에 도전하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6개월째 선생님을 붙여서 공부를 시키고 있다.
깜짝 놀랄 정도로 잘한다. 안타까운 점은 시각장애인들도 미대에 가고 싶어한다는 것을 국내 미대들이 모른다는 것이다.
일단 기회를 줘보라. 이들도 얼마든지 할 수가 있다.
-미대를 졸업한 후에는 작품을 전시할 기회도 있어야겠다.
▶우리들의 눈 갤러리(서울시 종로구 화동에 있으며 시각장애인 작품을 주로 전시한다)와 같은 곳이 그런 무대다.
아직 다른 곳에서는 시각장애인 작품들을 계속 보여주기가 힘들다.
장애가 아니라 창의성에 방점을 찍고, 제대로 된 조명 아래 작품을 전시한다.
그래야 관람객들이 작품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이날 갤러리에는 황금귀, 거미줄 등 여러 작품이 전시돼 있었다.
작품 곁에는 시각장애인이 직접 쓴 설명이 붙어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생 작품인 `거미줄` 옆에는 `거미줄에는 곤충이 걸리고, 장미꽃 옆에는 사람이 걸려요`라고 적혀 있었다).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도 만들었다고 들었다.
▶색을 소리로 전환해서 인식할 수 있는 앱이다.
한 시각장애인에게 들은 얘기가 마음이 아파 만들었다.
이 장애인은 "여러 색깔로 코디를 해서 옷을 멋있게 입고 싶은데, 색이 명확히 보이지 않으니까, 힘들다"고 했다. 그래서 스마트폰을 대면 색깔에 따라 다른 소리가 나오는 앱을 만들었다. 작년에 대기업 계열에서 실시한 공모전에서 혁신상을 받았다. 그런데 돈이 없어서 현재 개발이 중단된 상태다. 기업과 함께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본다는 게 무엇인가에 대한 답은 찾았나.
▶근본적인 질문이라서 정답이 무엇이라고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저 역시 이 일을 하면서 예술가로서 성장하고 있다. 답 찾기를 포기하지 않으면서 더욱 깊게 들어가면, 대상을 보는 눈이나, 대상을 이해하는 방법, 작업을 하는 태도 등에 영향을 받는다. 제가 이 일을 17년 동안 계속하고 있다는 게 증거다.
■ Who is She?
이화여대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독일 뮌헨미술대에서 회화를 전공했다.
건국대 회화과 조교수로 재직했으며 현재는 전업작가로 활동 중이다. 보이는 것의 이면을 찾는 과정을 회화, 사진, 설치 작업 등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1997년 `우리들의 눈`을 창립해 시각장애인 미술 교육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우리들의 눈 갤러리 디텍터로 시각장애인 작품 전시기획도 하고 있다.
[김인수 기자 / 사진 = 이충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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