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효찬의 ‘서울대 권장도서 100선 읽기’](8) 아함경 ➊ | 왜 싯다르타는 자신을 ‘붓다(깨달음을 얻은 자)’라고 불렀나 | |
기사입력 2013.10.07 09:30:21 | ![]() ![]() ![]() |
아함경은 붓다가 깨달음을 얻고 45년 동안 설법을 하다 입적한 이후 제자들이 100년 동안 붓다의 언행을 재현해 초기 불교의 모습을 담은 경전이다. 마스터니 후미오의 ‘아함경(현암사)’으로 개괄한 후에 성열 편역의 ‘부처님 말씀(현암사)’을 함께 보면 방대한 아함경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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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의 길고 긴 역사를 관찰해보니 이 세상 모든 존재들이 직면하는 고뇌는 태어난 자는 반드시 죽음을 맞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객관 대상에 대한 집착과 내면적으로 망상에 매달리는 것에서 벗어나 독화살과 같은 번뇌를 없애버렸으니 생과 사의 문제에서 초래되는 갈등에서 자유를 얻었다.” 아함경에 나오는 이 말은 고타마 싯다르타(BC 563~ 483년)가 자신을 왜 ‘붓다(깨달음을 얻은 자)’라고 칭하는지를 한 바라문(브라만교)에게 설명해주는 구절이다. 아함경은 고타마가 35살에 깨달음을 얻은 후 80세에 입적하기까지 붓다와 그 제자들이 행한 초기 불교의 모습을 생생하게 담고 있다. 붓다의 가르침이 사라질 것을 걱정한 500명의 제자들이 100년 동안에 걸쳐 붓다의 가르침을 결집해 만든 경전이 바로 아함경이다. 아함경은 한 사람이 붓다의 말씀을 기억해내고 그 기억해낸 것을 함께 외워 공인하는 형식으로 결집됐는데 장아함경, 중아함경, 잡아함경, 증일아함경 등으로 구성된다. 아함(阿含)은 ‘아가마’의 한역인데 ‘전해 온 것’이라는 뜻이다. 29살에 출가한 붓다는 알라라 칼라마와 우다카 라마푸타라는 두 스승에게 잠시 가르침을 받다 ‘고행 수행법’으로 깨달음을 얻기 위해 스승 곁을 떠났다. 6년 동안 고행에 정진했지만 몸만 극도로 쇠약해지고 정신마저 몽롱해질 뿐, 아무런 깨달음도 얻을 수 없었다. 여기서 붓다는 중대 결단을 내린다. 고행 수행법이 최상의 방법이 아니라며 이를 떨쳐버린 것이다. 고행으로는 결코 선정에 이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자 7일 만에 깨달음이 불현듯 찾아왔다. 삶은 고해이지만 나와 연결된 ‘집착’을 버림으로써 고해에서 벗어나 해탈에 이를 수 있다는 깨달음이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붓다가 당시 수행법이었던 고행주의를 과감하게 포기한 것이다. 고행이란 육체를 약화시킴으로써 정신의 힘을 높일 수 있다는 사고방식에서 나온 수행법이다. 고행에 신비한 힘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던 고대 인도사회에서 그 불합리성을 확인하고 그로부터 탈출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이는 기존 관념을 깨부수는 혁신적인 것이었다. 그가 고행을 중지하자 함께 수행하던 다섯 사문(전통적인 ‘베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수행자로 후에는 불교 수행자를 의미)들이 붓다를 비난하고 그를 떠난 것만 봐도 짐작할 수 있다. 붓다는 고행을 포기한 이유에 대해 “이를테면 물속에 잠겨 있는 젖은 나무를 보고, 좋은 찬목(마찰해 불을 일으키는 나무)을 갖고 와서 ‘내가 불을 일으키리라. 빛을 내게 하리라’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고 비유한다. 젖은 나무는 아무리 마찰시켜도 불이 생겨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고행을 해봤자 고행으로는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과감한 포기가 오히려 큰 깨달음을 안겨줬다. 그의 출가가 왕족이라는 기득권의 ‘크나큰 포기’인 것처럼 이번에는 고행 수행을 포기함으로써 마침내 정각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포기할 줄 알아야 큰 것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해탈을 얻은 붓다는 자신의 심심미묘한 깨달음을 혼자만 간직할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야 할지 심각한 고민에 빠진다. 자신의 깨달음을 이해해주지 못할까 대중 설법을 지레 회의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붓다는 고민을 떨치고 자신의 깨달음에 대해 공개적인 설법을 펴기로 또 한 번 중대결심을 한다. 붓다는 당시 바라문 사제들이 우파니샤드의 가르침을 비밀리에 전수한 것처럼, 자신 또한 자신의 깨달음을 공개적으로 설법하기를 포기했을 수도 있었다. 붓다의 공개 설법 역시 당시 관행으로서는 획기적인 시도이자 도전이었던 것이다. 자신의 깨달음을 설법하기로 결심했지만 이번에는 과연 누구에게 이 법(진리)을 설할 것이냐의 문제에 부딪친다. 붓다는 첫 설법 상대로 옛 스승을 떠올렸다. 스승이라면 심심미묘한 이치를 이해해 주려니 생각했다. 그러나 수소문한 결과 두 스승은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다. 붓다는 생각 끝에 옛 친구들을 설법의 대상으로 선택했다. 붓다가 고행을 포기하는 것을 보고는 붓다를 경멸하면서 떠난 다섯 사문들이었다. 붓다는 첫 설법을 위해 말하자면 ‘까다롭고 벅찬’ 상대를 고른 것이다. 붓다가 무려 250㎞를 걸어 녹야원에 도착했지만 다섯 명의 비구들은 붓다를 보고도 아무도 반가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고행을 버리고 사치에 떨어진 사람’이라며 붓다를 경멸의 눈으로 대했다. “출가한 이는 두 극단을 달려가서는 안 되나니, 온갖 욕망에 깊이 집착하지 말고 고행을 일삼지 마라. 나는 두 극단을 버리고 ‘중도’를 깨달았으니 그것은 눈을 뜨게 하고 지혜를 생기게 한다.” 붓다의 첫 설법은 두 극단적인 입장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된다. 그 하나는 쾌락주의의 입장, 즉 온갖 욕망에 깊이 집착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다. 또 하나는 금욕주의의 입장, 즉 스스로 고행을 일삼는 것에 대한 비판이다. 두 극단적인 입장에 대한 비판은 바로 그 자신의 과거에 대한 통렬한 반성이기도 했다. 붓다는 겸손하고 열정적인 자세로 깨달음의 내용을 체계적으로 설명했다. 첫 설법에서 붓다는 네 가지 진리를 들려줬는데 이게 바로 오늘날 불교에서 말하는 ‘사성제(四聖諦)’다. 사성제는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라는 말로, 붓다의 인생관이 집약된 것이다. 먼저 인생의 현실은 괴로움(苦)으로 충만해 있다. 미운 사람을 만남도,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함도, 갖고 싶은 것을 얻지 못함도 ‘고’라고 했다. 한마디로 이 인생의 양상은 ‘고’ 아닌 것이 없다. 이런 괴로움의 원인은 번뇌 때문이다. 번뇌를 없애면 괴로움이 없는 열반의 세계에 이르게 된다.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는 팔정도(八正道)를 실천해야 된다. 팔정도는 바른 견해(正見), 바른 생각(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활(正命), 바른 노력(正精進), 바른 신념(正念), 바른 명상(正定) 등이다. 이로써 붓다가 처음으로 행한 설법의 프레젠테이션이 끝났다. 붓다의 설법은 자신의 주장이나 신념을 설파한 최초의 프레젠테이션이 아니었을까. 이 설법을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고 부른다. 첫 설법을 하고 며칠이 지나자 다섯 비구 중 한 사람인 콘단냐가 최초로 붓다의 사상체계인 사성제와 팔정도를 이해하게 됐다. 이에 붓다는 “콘단냐는 먼저 티 없는 청정한 법안(法眼)을 떴다”면서 “콘단냐는 깨달았다”고 말했다. 첫 제자의 탄생이었다. 이어 나머지 네 명도 붓다의 설법을 이해하게 됐고 이렇게 그를 비난했던 다섯 명의 비구들은 모두 붓다의 첫 제자가 됐다. 붓다는 제자들이 60명으로 불어나자 전도를 위해 세상으로 제자들을 떠나보낸다. 붓다는 전도를 떠나는 제자들에게 수계, 즉 출가를 허가하는 권한을 줬다. 이는 파격적인 권한 이양이었다. 제자들은 붓다를 대신해 붓다의 마케터가 돼 그의 사상을 널리 전파했다. ‘리더의 유일한 정의는 추종자를 두는 것’이라는 피터 드러커의 말처럼 붓다가 깨달음을 얻고 진리를 전파하기 위한 과정은 리더십 측면에서 훌륭한 사례가 되고도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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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비극 ➋모든 비극은 ‘하마르티(판단착오)아’에서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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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3.09.30 09:09:08 | 최종수정 2013.09.30 09:34: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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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를 테베 밖으로 이끄는 안티고네. | ||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고 중요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이런 명제를 던졌다. 시는 보편적인 것을 말하는 경향이 더 강하고, 역사는 개별적인 것을 말하기 때문이라고 그는 부연한다. 비극에서 인물의 행동을 통해 전달되는 연민과 두려움은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주는 현상으로 이어지면서 보편적인 어떤 정신세계로 고양시켜 준다는 것이다. 즉 ‘행복에서 불행으로’ 떨어지는 주인공의 운명을 통해 그 비극이 들려주고자 하는 보편성을 읽어낼 수 있다는 얘기다. 주인공의 저항할 수 없는 운명 앞에는 한 인간이 겪는 ‘중대한 과실’이 반드시 포함돼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주인공의 운명과 관련해 ‘하마르티아(Hamartia)’라는 중요한 개념을 제시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비극적인 주인공의 운명은 불행에서 행복으로 바뀌어서는 안 되고 반드시 행복에서 불행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러나 그 원인은 비행(非行)이 아니라 하마르티아에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비극의 주인공은 악덕이나 비행 때문이 아니라 어떤 과실 혹은 판단 착오 때문에 행복한 삶이 불행을 당해야 하는데 이게 바로 하마르티아다. 이 단어는 궁술에서 나온 것으로 ‘과녁에서 빗나간 것’ ‘표적을 빗맞춘 것’을 뜻한다. 하마르티아를 주인공의 성격적 결함이나 도덕적 흠으로 보기도 한다.
우리 모두는 비극의 주인공이요, 주인공이 겪는 하마르티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누구든 인간인 이상 판단 착오를 할 수 있고 이게 거대한 운명의 바퀴 속으로 빠져들 수 있기 때문이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은 테베의 왕에서 쫓겨나고 자신의 눈마저 찌르는 한 인간의 운명을 노래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오이디푸스 왕을 가장 완벽한 비극 작품으로 보고 대표적인 하마르티아의 예로 오이디푸스 왕을 든다.
이 비극은 테베에 신의 노여움으로 전염병이 창궐해 재앙에 빠지는 것으로 시작한다. 오이디푸스는 전염병을 막기 위해 싸운다. 델포이의 신탁은 페스트라는 재앙이 테베에 내린 것은 이 도시에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욕보임으로써 신들의 분노를 산 사나이(오이디푸스)가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오이디푸스에게 말한다.
“이 땅에서 생기고 키워진 더러운 일이 우리를 파멸시키지 않도록 씻어 없애라.”
더러운 일은 바로 오이디푸스의 친부 살해와 친모와의 결혼이다. 그러자 오이디푸스는 재앙을 유발한 이 사나이를 찾는 데에 전심전력을 기울인다. 그는 그 주인공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짐작하지 못한다. 오이디푸스가 아버지 라이오스를 죽이고 어머니 이오카스테와 결혼한 것이 바로 중대한 과실, 즉 하마르티아에 해당한다. 결국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범인임을 알고 자신의 운명을 원망하면서 스스로 눈을 찌른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그때까지 눈으로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된다. 육체적으로 볼 수 있는 인간이었을 때 눈이 멀었었지만 정작 지금 눈먼 자가 되고서야 제대로 보게 됐다는 것이다.
마지막 코러스(노래)는 이렇게 울려 퍼진다.
“테베 사람들이여, 명심하고 보라. 이이가 오이디푸스이시다. 그야말로 저 이름 높은, 죽음의 수수께끼를 풀고, 권세 이를 데 없던 사람. 아아, 이제는 저토록 격렬한 풍파에 묻히고 마셨다. 그러니 사람으로 태어난 몸은 조심스럽게 운명으로 정해진 마지막 날을 볼 수 있도록 기다려라. 아무 괴로움도 당하지 말고 삶의 저편에 이르기 전에는 이 세상 누구도 행복하다고 하지 마라.”
소포클레스는 이어 ‘오이디푸스 왕’의 속편 격으로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도 썼다. 오이디푸스가 떠나고 난 뒤 테베 왕국의 권력을 놓고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네이케스 두 쌍둥이 아들과 새로운 권력자 크레온이 벌이는 반목과 질시를 다룬 이야기다. 오이디푸스가의 저주는 오이디푸스 자신뿐 아니라 그의 아버지 라이오스 왕, 어머니이자 아내, 그의 두 아들, 나아가 딸 안티고네까지 이어지는데 결국 모두 죽음으로 귀결된다.
누구든 인간인 이상 판단 착오를 할 수 있고 뜻하지 않게 거대한 운명의 바퀴 속으로 빠져들 수 있다.
소포클레스는 조화와 규범, 억제 등 아폴론적인 질서를 중시한 보수적인 작가였다. 그는 운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지라도 “우리에게는 자신의 정신을 지배할 수 있는 내면의 성채가 존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 내면의 성채는 권력자에 대항해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고 목을 매 자살을 택한 ‘안티고네’와 아버지를 살해한 어머니에 대한 남매의 보복살해가 내용인 ‘엘렉트라’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엘렉트라는 아버지의 궁전에서 하녀처럼 살며 분노를 태우지만 정작 ‘그 여자(어머니)’에게 모욕당하면서도 어쩌지 못한다. 그러다 엘렉트라는 남동생인 오레스테스를 만나면서 억눌려 있던 분노를 폭발시키고 어머니를 죽이는 데 적극 가담한다.
“세게 내려쳐. 한 번 더 그럴 수 있다면! 죄를 진 자가 이제 죽었다.”
어머니에 대한 엘렉트라의 복수심에 찬 대사가 가슴을 전율하게 한다.
프로이트가 정신분석학에서 말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에서, 그리고 이에 대비되는 ‘엘렉트라 콤플렉스’는 이 작품에서 유래한 것이다.
엘렉트라는 3대 비극 작가 모두 약간씩 다른 플롯으로 썼는데 비교하며 읽을 만하다. 비극은 가장 잔인한 이야기들의 원형이라는 말이 있듯, 인간의 가장 추악한 밑바닥까지 들춘다. 추악을 통해 선한 인간, 광기를 통해 합리적인 인간이 될 수 있도록, 마치 예방주사를 맞는 것처럼 해준다는 것이다. 이게 비극이 지닌 ‘예방적 치료력’이며 비극이 지닌 최고의 가치라고 니체는 말한다.
그리스의 마지막 비극 작가인 에우리피데스의 ‘바코스(디오니소스의 로마식 표기)의 여신도들’에서는 디오니소스적인 광기를 엿볼 수 있다. 테베의 왕 펜테우스는 새롭게 등장한 디오니소스 신에 대한 경배를 거부한 오만한 행동으로 광란의 디오니소스 축제에 참가한 어머니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된다. 자식을 짐승으로 착각하고 갈기갈기 찢어 죽인 어머니를 보고 관객들은 디오니소스적 광기에 전율하며 그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삶의 광기를 경계했을 것이다.
니체는 비극은 괴로워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빌려 현상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라며 이렇게 말한다.
“보라! 잘 보라! 이것이 그대들의 삶이다. 이것이 그대들 생활의 시곗바늘이다.”
그리스 비극 작가들은 신화에 예술적 상상력을 가미해 인간의 존재를 탐구하고 인간 존재의 밑바닥까지 꿰뚫고 들어가 우리들 실재의 세계, 본질의 세계를 찾으려고 했다. 비극 작가들은 공포와 허무, 무서움에 직면하면서도 이를 아폴론적인 예술로 승화함으로써 디오니소스적인 광기를 정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예컨대 ‘바코스의 여신도들’에서 여성들이 디오니소스 축제에 참여함으로써 가부장적 남성 중심 사회의 내면 깊숙이 자리 잡은 일상적인 규범과 질서를 전복하고자 하는 억제된 충동을 해소할 수 있게 해줬다는 것이다.
그러다 플라톤 시대에 이르러 플라톤은 시인의 모방은 이데아를 모방한 현실의 모방으로 저급한 것이라며 ‘시인 추방론’을 제기한다. 당시 젊은 비극 작가였던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되기 위해 제일 먼저 그의 비극 작품을 불살라 버렸다. 소크라테스주의가 등장하면서 그리스 비극은 몰락하고 이와 함께 신화 시대도 종언을 고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비극적인 주인공의 운명은 불행에서 행복으로 바뀌어서는 안 되고 반드시 행복에서 불행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러나 그 원인은 비행(非行)이 아니라 하마르티아에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비극의 주인공은 악덕이나 비행 때문이 아니라 어떤 과실 혹은 판단 착오 때문에 행복한 삶이 불행을 당해야 하는데 이게 바로 하마르티아다. 이 단어는 궁술에서 나온 것으로 ‘과녁에서 빗나간 것’ ‘표적을 빗맞춘 것’을 뜻한다. 하마르티아를 주인공의 성격적 결함이나 도덕적 흠으로 보기도 한다.
우리 모두는 비극의 주인공이요, 주인공이 겪는 하마르티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누구든 인간인 이상 판단 착오를 할 수 있고 이게 거대한 운명의 바퀴 속으로 빠져들 수 있기 때문이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은 테베의 왕에서 쫓겨나고 자신의 눈마저 찌르는 한 인간의 운명을 노래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오이디푸스 왕을 가장 완벽한 비극 작품으로 보고 대표적인 하마르티아의 예로 오이디푸스 왕을 든다.
이 비극은 테베에 신의 노여움으로 전염병이 창궐해 재앙에 빠지는 것으로 시작한다. 오이디푸스는 전염병을 막기 위해 싸운다. 델포이의 신탁은 페스트라는 재앙이 테베에 내린 것은 이 도시에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욕보임으로써 신들의 분노를 산 사나이(오이디푸스)가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오이디푸스에게 말한다.
“이 땅에서 생기고 키워진 더러운 일이 우리를 파멸시키지 않도록 씻어 없애라.”
더러운 일은 바로 오이디푸스의 친부 살해와 친모와의 결혼이다. 그러자 오이디푸스는 재앙을 유발한 이 사나이를 찾는 데에 전심전력을 기울인다. 그는 그 주인공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짐작하지 못한다. 오이디푸스가 아버지 라이오스를 죽이고 어머니 이오카스테와 결혼한 것이 바로 중대한 과실, 즉 하마르티아에 해당한다. 결국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범인임을 알고 자신의 운명을 원망하면서 스스로 눈을 찌른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그때까지 눈으로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된다. 육체적으로 볼 수 있는 인간이었을 때 눈이 멀었었지만 정작 지금 눈먼 자가 되고서야 제대로 보게 됐다는 것이다.
마지막 코러스(노래)는 이렇게 울려 퍼진다.
“테베 사람들이여, 명심하고 보라. 이이가 오이디푸스이시다. 그야말로 저 이름 높은, 죽음의 수수께끼를 풀고, 권세 이를 데 없던 사람. 아아, 이제는 저토록 격렬한 풍파에 묻히고 마셨다. 그러니 사람으로 태어난 몸은 조심스럽게 운명으로 정해진 마지막 날을 볼 수 있도록 기다려라. 아무 괴로움도 당하지 말고 삶의 저편에 이르기 전에는 이 세상 누구도 행복하다고 하지 마라.”
소포클레스는 이어 ‘오이디푸스 왕’의 속편 격으로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도 썼다. 오이디푸스가 떠나고 난 뒤 테베 왕국의 권력을 놓고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네이케스 두 쌍둥이 아들과 새로운 권력자 크레온이 벌이는 반목과 질시를 다룬 이야기다. 오이디푸스가의 저주는 오이디푸스 자신뿐 아니라 그의 아버지 라이오스 왕, 어머니이자 아내, 그의 두 아들, 나아가 딸 안티고네까지 이어지는데 결국 모두 죽음으로 귀결된다.
누구든 인간인 이상 판단 착오를 할 수 있고 뜻하지 않게 거대한 운명의 바퀴 속으로 빠져들 수 있다.
소포클레스는 조화와 규범, 억제 등 아폴론적인 질서를 중시한 보수적인 작가였다. 그는 운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지라도 “우리에게는 자신의 정신을 지배할 수 있는 내면의 성채가 존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 내면의 성채는 권력자에 대항해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고 목을 매 자살을 택한 ‘안티고네’와 아버지를 살해한 어머니에 대한 남매의 보복살해가 내용인 ‘엘렉트라’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엘렉트라는 아버지의 궁전에서 하녀처럼 살며 분노를 태우지만 정작 ‘그 여자(어머니)’에게 모욕당하면서도 어쩌지 못한다. 그러다 엘렉트라는 남동생인 오레스테스를 만나면서 억눌려 있던 분노를 폭발시키고 어머니를 죽이는 데 적극 가담한다.
“세게 내려쳐. 한 번 더 그럴 수 있다면! 죄를 진 자가 이제 죽었다.”
어머니에 대한 엘렉트라의 복수심에 찬 대사가 가슴을 전율하게 한다.
프로이트가 정신분석학에서 말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에서, 그리고 이에 대비되는 ‘엘렉트라 콤플렉스’는 이 작품에서 유래한 것이다.
엘렉트라는 3대 비극 작가 모두 약간씩 다른 플롯으로 썼는데 비교하며 읽을 만하다. 비극은 가장 잔인한 이야기들의 원형이라는 말이 있듯, 인간의 가장 추악한 밑바닥까지 들춘다. 추악을 통해 선한 인간, 광기를 통해 합리적인 인간이 될 수 있도록, 마치 예방주사를 맞는 것처럼 해준다는 것이다. 이게 비극이 지닌 ‘예방적 치료력’이며 비극이 지닌 최고의 가치라고 니체는 말한다.
그리스의 마지막 비극 작가인 에우리피데스의 ‘바코스(디오니소스의 로마식 표기)의 여신도들’에서는 디오니소스적인 광기를 엿볼 수 있다. 테베의 왕 펜테우스는 새롭게 등장한 디오니소스 신에 대한 경배를 거부한 오만한 행동으로 광란의 디오니소스 축제에 참가한 어머니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된다. 자식을 짐승으로 착각하고 갈기갈기 찢어 죽인 어머니를 보고 관객들은 디오니소스적 광기에 전율하며 그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삶의 광기를 경계했을 것이다.
니체는 비극은 괴로워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빌려 현상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라며 이렇게 말한다.
“보라! 잘 보라! 이것이 그대들의 삶이다. 이것이 그대들 생활의 시곗바늘이다.”
그리스 비극 작가들은 신화에 예술적 상상력을 가미해 인간의 존재를 탐구하고 인간 존재의 밑바닥까지 꿰뚫고 들어가 우리들 실재의 세계, 본질의 세계를 찾으려고 했다. 비극 작가들은 공포와 허무, 무서움에 직면하면서도 이를 아폴론적인 예술로 승화함으로써 디오니소스적인 광기를 정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예컨대 ‘바코스의 여신도들’에서 여성들이 디오니소스 축제에 참여함으로써 가부장적 남성 중심 사회의 내면 깊숙이 자리 잡은 일상적인 규범과 질서를 전복하고자 하는 억제된 충동을 해소할 수 있게 해줬다는 것이다.
그러다 플라톤 시대에 이르러 플라톤은 시인의 모방은 이데아를 모방한 현실의 모방으로 저급한 것이라며 ‘시인 추방론’을 제기한다. 당시 젊은 비극 작가였던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되기 위해 제일 먼저 그의 비극 작품을 불살라 버렸다. 소크라테스주의가 등장하면서 그리스 비극은 몰락하고 이와 함께 신화 시대도 종언을 고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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