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창고

[최효찬의 ‘서울대 권장도서 100선 읽기’](

길벗 道伴 2013. 10. 18. 09:59

[최효찬의 ‘서울대 권장도서 100선 읽기’](8) 아함경 ➊ | 왜 싯다르타는 자신을 ‘붓다(깨달음을 얻은 자)’라고 불렀나
기사입력 2013.10.07 09:30:21 트위터 미투데이 블로그 스크랩
아함경은 붓다가 깨달음을 얻고 45년 동안 설법을 하다 입적한 이후 제자들이 100년 동안 붓다의 언행을 재현해 초기 불교의 모습을 담은 경전이다. 마스터니 후미오의 ‘아함경(현암사)’으로 개괄한 후에 성열 편역의 ‘부처님 말씀(현암사)’을 함께 보면 방대한 아함경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중생의 길고 긴 역사를 관찰해보니 이 세상 모든 존재들이 직면하는 고뇌는 태어난 자는 반드시 죽음을 맞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객관 대상에 대한 집착과 내면적으로 망상에 매달리는 것에서 벗어나 독화살과 같은 번뇌를 없애버렸으니 생과 사의 문제에서 초래되는 갈등에서 자유를 얻었다.”

아함경에 나오는 이 말은 고타마 싯다르타(BC 563~ 483년)가 자신을 왜 ‘붓다(깨달음을 얻은 자)’라고 칭하는지를 한 바라문(브라만교)에게 설명해주는 구절이다.

아함경은 고타마가 35살에 깨달음을 얻은 후 80세에 입적하기까지 붓다와 그 제자들이 행한 초기 불교의 모습을 생생하게 담고 있다. 붓다의 가르침이 사라질 것을 걱정한 500명의 제자들이 100년 동안에 걸쳐 붓다의 가르침을 결집해 만든 경전이 바로 아함경이다. 아함경은 한 사람이 붓다의 말씀을 기억해내고 그 기억해낸 것을 함께 외워 공인하는 형식으로 결집됐는데 장아함경, 중아함경, 잡아함경, 증일아함경 등으로 구성된다. 아함(阿含)은 ‘아가마’의 한역인데 ‘전해 온 것’이라는 뜻이다.

29살에 출가한 붓다는 알라라 칼라마와 우다카 라마푸타라는 두 스승에게 잠시 가르침을 받다 ‘고행 수행법’으로 깨달음을 얻기 위해 스승 곁을 떠났다. 6년 동안 고행에 정진했지만 몸만 극도로 쇠약해지고 정신마저 몽롱해질 뿐, 아무런 깨달음도 얻을 수 없었다. 여기서 붓다는 중대 결단을 내린다. 고행 수행법이 최상의 방법이 아니라며 이를 떨쳐버린 것이다. 고행으로는 결코 선정에 이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자 7일 만에 깨달음이 불현듯 찾아왔다. 삶은 고해이지만 나와 연결된 ‘집착’을 버림으로써 고해에서 벗어나 해탈에 이를 수 있다는 깨달음이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붓다가 당시 수행법이었던 고행주의를 과감하게 포기한 것이다. 고행이란 육체를 약화시킴으로써 정신의 힘을 높일 수 있다는 사고방식에서 나온 수행법이다. 고행에 신비한 힘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던 고대 인도사회에서 그 불합리성을 확인하고 그로부터 탈출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이는 기존 관념을 깨부수는 혁신적인 것이었다. 그가 고행을 중지하자 함께 수행하던 다섯 사문(전통적인 ‘베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수행자로 후에는 불교 수행자를 의미)들이 붓다를 비난하고 그를 떠난 것만 봐도 짐작할 수 있다.

붓다는 고행을 포기한 이유에 대해 “이를테면 물속에 잠겨 있는 젖은 나무를 보고, 좋은 찬목(마찰해 불을 일으키는 나무)을 갖고 와서 ‘내가 불을 일으키리라. 빛을 내게 하리라’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고 비유한다. 젖은 나무는 아무리 마찰시켜도 불이 생겨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고행을 해봤자 고행으로는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과감한 포기가 오히려 큰 깨달음을 안겨줬다. 그의 출가가 왕족이라는 기득권의 ‘크나큰 포기’인 것처럼 이번에는 고행 수행을 포기함으로써 마침내 정각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포기할 줄 알아야 큰 것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해탈을 얻은 붓다는 자신의 심심미묘한 깨달음을 혼자만 간직할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야 할지 심각한 고민에 빠진다. 자신의 깨달음을 이해해주지 못할까 대중 설법을 지레 회의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붓다는 고민을 떨치고 자신의 깨달음에 대해 공개적인 설법을 펴기로 또 한 번 중대결심을 한다. 붓다는 당시 바라문 사제들이 우파니샤드의 가르침을 비밀리에 전수한 것처럼, 자신 또한 자신의 깨달음을 공개적으로 설법하기를 포기했을 수도 있었다. 붓다의 공개 설법 역시 당시 관행으로서는 획기적인 시도이자 도전이었던 것이다.

자신의 깨달음을 설법하기로 결심했지만 이번에는 과연 누구에게 이 법(진리)을 설할 것이냐의 문제에 부딪친다. 붓다는 첫 설법 상대로 옛 스승을 떠올렸다. 스승이라면 심심미묘한 이치를 이해해 주려니 생각했다. 그러나 수소문한 결과 두 스승은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다. 붓다는 생각 끝에 옛 친구들을 설법의 대상으로 선택했다. 붓다가 고행을 포기하는 것을 보고는 붓다를 경멸하면서 떠난 다섯 사문들이었다. 붓다는 첫 설법을 위해 말하자면 ‘까다롭고 벅찬’ 상대를 고른 것이다. 붓다가 무려 250㎞를 걸어 녹야원에 도착했지만 다섯 명의 비구들은 붓다를 보고도 아무도 반가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고행을 버리고 사치에 떨어진 사람’이라며 붓다를 경멸의 눈으로 대했다.

“출가한 이는 두 극단을 달려가서는 안 되나니, 온갖 욕망에 깊이 집착하지 말고 고행을 일삼지 마라. 나는 두 극단을 버리고 ‘중도’를 깨달았으니 그것은 눈을 뜨게 하고 지혜를 생기게 한다.”

붓다의 첫 설법은 두 극단적인 입장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된다. 그 하나는 쾌락주의의 입장, 즉 온갖 욕망에 깊이 집착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다. 또 하나는 금욕주의의 입장, 즉 스스로 고행을 일삼는 것에 대한 비판이다. 두 극단적인 입장에 대한 비판은 바로 그 자신의 과거에 대한 통렬한 반성이기도 했다. 붓다는 겸손하고 열정적인 자세로 깨달음의 내용을 체계적으로 설명했다.

첫 설법에서 붓다는 네 가지 진리를 들려줬는데 이게 바로 오늘날 불교에서 말하는 ‘사성제(四聖諦)’다. 사성제는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라는 말로, 붓다의 인생관이 집약된 것이다.

먼저 인생의 현실은 괴로움(苦)으로 충만해 있다. 미운 사람을 만남도,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함도, 갖고 싶은 것을 얻지 못함도 ‘고’라고 했다. 한마디로 이 인생의 양상은 ‘고’ 아닌 것이 없다. 이런 괴로움의 원인은 번뇌 때문이다. 번뇌를 없애면 괴로움이 없는 열반의 세계에 이르게 된다.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는 팔정도(八正道)를 실천해야 된다. 팔정도는 바른 견해(正見), 바른 생각(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활(正命), 바른 노력(正精進), 바른 신념(正念), 바른 명상(正定) 등이다.

이로써 붓다가 처음으로 행한 설법의 프레젠테이션이 끝났다. 붓다의 설법은 자신의 주장이나 신념을 설파한 최초의 프레젠테이션이 아니었을까. 이 설법을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고 부른다.

첫 설법을 하고 며칠이 지나자 다섯 비구 중 한 사람인 콘단냐가 최초로 붓다의 사상체계인 사성제와 팔정도를 이해하게 됐다. 이에 붓다는 “콘단냐는 먼저 티 없는 청정한 법안(法眼)을 떴다”면서 “콘단냐는 깨달았다”고 말했다. 첫 제자의 탄생이었다. 이어 나머지 네 명도 붓다의 설법을 이해하게 됐고 이렇게 그를 비난했던 다섯 명의 비구들은 모두 붓다의 첫 제자가 됐다. 붓다는 제자들이 60명으로 불어나자 전도를 위해 세상으로 제자들을 떠나보낸다.

붓다는 전도를 떠나는 제자들에게 수계, 즉 출가를 허가하는 권한을 줬다. 이는 파격적인 권한 이양이었다. 제자들은 붓다를 대신해 붓다의 마케터가 돼 그의 사상을 널리 전파했다. ‘리더의 유일한 정의는 추종자를 두는 것’이라는 피터 드러커의 말처럼 붓다가 깨달음을 얻고 진리를 전파하기 위한 과정은 리더십 측면에서 훌륭한 사례가 되고도 남는다.

아함경 ➋ 열반의 방해물 탐욕·노여움·어리석음
기사입력 2013.10.14 08:50:25

“도망친 여인을 찾는 것과 잃어버린 자기를 찾는 일 중에서 어느 쪽이 소중한가?”

하루는 붓다가 물건을 훔쳐 도망친 여자를 찾고 있다는 젊은이를 만났는데 그 젊은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젊은이는 그 자리에서 붓다의 제자가 됐다.

붓다는 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을 바로잡아 주는데 이를 네 가지 전도(顚倒)로 설명한다. 인간이 빠지기 쉬운 잘못을 상(常)전도, 낙(樂)전도, 정(淨)전도, 아(我)전도 등 네 가지로 분류했다.

상전도는 이 무상한 세상(존재)을 영원한 듯이 생각하는 것이며, 낙전도는 이 괴로운 인생을 즐겁다고 여기는 일이다. 정전도는 이 부정한 것(세상)을 깨끗하다고 잘못 아는 일이며, 아전도는 이 무아인 존재를 자아가 있는 것처럼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착각을 없애고 그릇된 생각을 바로잡는 것이 붓다의 가르침의 중요한 일면이었다.

전도가 생기는 이유는 결국 ‘탐욕’과 ‘노여움’ 그리고 ‘어리석음’ 때문이며 이게 열반에 이르는 데 방해물이라고 붓다는 설파한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탐욕과 노여움, 어리석음 이 세 가지만 자제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살다 보면 이게 결코 쉽지가 않다. 그래서 사람들은 탐욕의 불꽃에 의해 타고 노여움의 불꽃에 의해 타고 어리석음의 불꽃에 의해 타고 있다고 한다. 흔히 말하는 ‘욕망의 불꽃’이다. 고조된 욕망의 상태를 ‘갈애’라고 한다. “세상은 갈애에 의해 인도되고 갈애에 의해 괴로움을 당하는 것. 갈애야말로 일체를 예속시키도다(상응부경전).” 붓다는 갈애에 의해 일어난 번뇌의 불꽃이 완전히 꺼질 때 거기서 나타나는 시원하고 편안한 경지, 그것이 열반이라고 한다.

붓다는 어느 날 한 수학자로부터 열반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못가라나라는 수학자는 “수학은 차례를 좇아 가르치는데 불교에도 순서를 좇아 배워야 할 길이 있느냐”고 붓다에게 물었다. 붓다는 “그렇다”고 대답하면서 열반에 이르는 점진적인 과정을 말해줬다.

먼저 계(戒)를 지킬 것, 그리고 오근(눈·귀·코·혀·피부)을 제어할 것, 다음에 정념과 정지(正知)를 성취해 지혜로써 번뇌를 누르고 온갖 집착과 불선을 떠나 점차 무상 안온의 경지인 열반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해줬다. 열반은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고 수행에 정진하다 보면 점진적으로 이를 수 있다는 가르침이었다.

그러자 수학자는 “그런 가르침에 의해 지도되는 제자들은 누구나 열반에 이르게 되느냐”고 물었다. 이번에는 붓다가 “아니다”라고 대답했다. “엄연히 열반이 존재하고 거기에 이르는 길이 있으며 또 세존께서 스승이 돼 계신데 어떤 이유로 이르는 사람이 있고, 이르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까”라고 수학자는 따져 물었고 붓다는 이렇게 답했다.

“그대에게 라자가하에 이르는 길을 묻는 사람이 있다 하자. 그대는 아마도 그들을 위해 자세히 길을 알려 주리라. 그러나 어떤 사람은 무사히 라자가하에 이르고 어떤 사람은 길을 잘못 들어 엉뚱한 곳을 헤매기도 할 것이다. 그것은 어째서 그렇겠는가?”

그러자 수학자는 “저는 길을 가르쳐 줄 따름입니다”라고 말한다. 붓다는 다시 이렇게 답한다. “그대의 말대로 열반은 엄연히 존재하고 거기에 이르는 길도 있으며 내가 스승 노릇 하고 있음도 사실이다. 그러나 제자 중에 열반에 이르기도 하고 이르지 못하기도 한다. 그것을 내가 어찌할 수 있겠는가? 나는 오직 길을 가르쳐주는 이에 불과한 것이다.”

붓다는 자주 문답을 설법 방식으로 썼다. 또 그런 문답을 통해 붓다는 차차 상대를 인도해 스스로 어떤 결론에 이르게 하곤 했다.

초기불교에서는 붓다와 그 제자들이 지금처럼 독경이나 불공을 올리는 일이 없었다. 금붙이로 만든 불상도 없었다. 제자들이 수행자였기 때문이다. 붓다가 설하는 가르침을 이해하고 그것을 자기 몸에 구현해 가는 일이 전부였다. 불교는 붓다 사후 100년 후에 18개로 분파(부파불교)하면서 분열되고 500년 후에는 대승불교로 발전하면서 수행자의 해탈에 초점을 둔 초기불교와는 다른 모습으로 변해갔다. 붓다는 열반에 들며 최후의 말을 제자들에게 남긴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라. 모든 것은 변화하느니라. 불방일(욕망에 빠지지 않고 자제와 집중을 지속하는 것)해 정진하도록 하라.”

아함경에는 초기불교가 어떻게 하나의 틀을 갖추면서 발전했는지를 알 수 있는 두 가지가 나온다. ‘포살(布薩)’과 ‘자자(自恣)’다. 불교가 대중적인 수행체계를 갖추게 된 것은 포살과 자자라는 두 행사가 행해지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포살은 산스크리트의 ‘포사다’에서 나왔다. 붓다가 라자가하 교외의 깃자쿠타라는 산에 있을 때 빔비사라 왕으로부터 한 제안이 들어왔다. 라자가하 부근에 있는 불교 이외의 종교 교단에서 보름에 두 번씩 집회를 열고 일반 신자들을 위해 설법을 한다는 것. 왕은 불교 교단에서도 그와 같은 것을 시행해봄이 어떻겠냐고 붓다에게 제안했다. 붓다가 이를 흔쾌히 받아들여 포살 행사를 갖게 됐다고 한다.

자자를 통해서는 초기불교의 엄격한 수행정신을 엿볼 수 있다. 자자란 자진해서 자기의 죄를 지적해 달라고 동료에게 청하는 일이다. 포살일의 행사라 해서 ‘포살자자’라고 했다. 자자에서 누구나 다음과 같은 게송(불교적 시의 한 형식)을 널리 읊조린다.

“나는 교만에 대해 자자를 행하노니, 나에 대해 무엇을 보고 무엇인가 듣고 또는 나에게 의심을 지니신 분이 있다면, 대덕들이여, 나를 가엾이 여기어 그를 말씀해주소서. 죄를 알면 그를 제거하오리다.”

잡아함경의 상응부경전에는 붓다와 그의 제자 500여명이 모여 자자를 행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제일 먼저 붓다 자신이 자자를 했다. 여기서 성스러움을 더하는 것은 바로 해탈에 이른 붓다가 자자에 가장 먼저 앞장섰다는 점이 아닐까.

“그동안 나의 언어와 행동에 그 무슨 잘못은 없었던가? 만일 조금이라도 그런 것을 보고 들은 사람이 있다면 벗들이여, 나를 가엾이 알아 부디 지적해 달라.”

이처럼 붓다의 가르침은 철두철미 ‘행(行)’이라고 할 수 있다. 대각을 이룬 붓다마저 자자를 하면서 자신을 반성하고 참회했다니 이 얼마나 인간적인 광경인가!

아함경에는 가족과 친구, 경제 등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붓다의 가르침도 많이 나온다.

요즘처럼 아들을 키워 며느리를 맞아들이고 자식에게 많은 재산을 물려줬더니 부모를 쫓아내 걸식하고 있다는 노인이 부처에게 하소연하는 내용도 있다. 이에 붓다는 “자식이란 지팡이보다도 못한 것”이라면서 “자식이 귀하다고 사랑만 할 것이 아니다”라는 내용의 게송을 지어준다.

붓다는 유혹을 이겨내기 위해 깊은 숲 속 인적 드문 곳으로 가라고 말하지 않았다. 유혹이 들끓는 마을에서 유혹을 견디는 것이 더 고상한 삶이라고 가르쳤다. 그래서 지금의 삶을 버리라고 가르치지도 않았다.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은 맹목적인 집착과 갈애 그리고 무지라고 일깨웠을 따름이다.

‘진리의 최대 적은 거짓이 아니라 신화’라는 말이 있다. 붓다는 “내 가르침도 버리라”고 말하며 진리의 절대화를 경계했다. 흔히 ‘부처가 되려면 부처를 죽여라’라는 말은 여기서 나온 것이다.

붓다와 그 제자들이 행한 초기불교의 ‘자자’ 의식이야말로 탐욕과 갈애로 신음하는 이 세상을 구원하는 마지막 의식처럼 느껴진다.

[최효찬 자녀경영연구소장·비교문학 박사 / 일러스트 : 정윤정]

****************************-----------------------------******************************************

 

그리스 비극 ➊ 민족의 청년기(융성한 시대)에 비극이 유행
기사입력 2013.09.16 15:31:25
그리스 비극은 조우현과 여석기 등이 옮긴 ‘그리스 비극 1, 2(현암사)’를 추천한다. 3대 비극 작가인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작품 33편 가운데 16편이 실려 있다. 이디스 해밀턴의 ‘고대 그리스인의 생각과 힘’은 비극을 읽기 전이나 후에 읽으면 전체적으로 이해하기 쉽다. 여기에 서울대 측이 함께 추천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과 니체의 ‘비극의 탄생’을 읽으면 비극에 대한 철학적 이해도 가능하다.

여기 두 장의 사진이 있다. 한 장은 산 중턱에 있는 극장으로 아폴론 신전과 신탁이 행해지던 고대 그리스의 배꼽(중심)으로 불린 델포이 극장이다. 기원전 4세기에 지어진 원형 극장. 관람석에 앉아 아폴론 신전과 산으로 둘러싸인 주변 풍경을 바라보면 어머니의 아늑한 품이 생각날 정도로 편안한 느낌이 든다고 한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시민들에게 최적의 ‘힐링’ 장소였을 것이다.

또 한 장은 시칠리아섬 산 정상에 있는 세제스타 원형극장으로 기원전 5세기에 지어졌다. 시칠리아는 BC 5세기 중엽 이전부터 아테네와 관계를 맺었다. BC 409년 이후 카르타고의 지배하에 들어가고 BC 263년에는 로마의 판도에 들어갔다. 세제스타 원형극장은 그리스 지배 시절에 들어섰는데 이로 미뤄 고대 그리스가 얼마나 연극을 장려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더욱이 세제스타 극장은 제천행사가 열렸던 신전이 있는 곳에서 무려 2㎞ 떨어져 있는 산꼭대기에 지어졌다. 수천 명의 관람객들은 산길을 올라 산 정상에 있는 극장에서 연극을 보기 위해 이른 새벽에 집을 나섰을 게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고대인들의 나들이인가! 이들은 그곳에서 연극을 보면서 하루를 보내고 저녁이 돼서야 산에서 내려왔을 것이다. 여름날에는 깜깜한 어둠을 무대로 밤새 연극이 공연되지 않았을까.

지금은 바람만 머무는 이 원형극장들이야말로 고대 그리스인들의 문화의 중심지이자 삶과 행복의 충전소 역할을 했을 성싶다. 조명도 없던 당시 야외극장에서 동이 틀 무렵부터 몰려든 관객은 하루 일곱 시간 이상 돌계단에 앉아 공연을 지켜보며 그들의 과거를 알고 미래를 그려보지 않았을까. 고대 그리스에서 연극은 국가적인 행사로 우대받았다. 국가는 연극을 보는 관객들에게 지원금도 줬다. 연극 경연제 운영도 국가가 맡았다.

아테네는 기원전 535년 참주정을 실시한 독재자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추방에서 돌아와 다시 집권한 무렵부터 디오니소스 축제에서 연극 경연제도가 제정됐고 국가적인 행사로 발전했다. 독재자에 의해 연극이 인간의 축제로 발전했다니, 이 또한 아이러니다. 아테네가 연극 경연을 주최하고 지원한 것은 연극이 국가와 사회의 통합에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 우리나라도 독재를 경험했듯, 독재자일수록 사회통합이 더 절실한 법이다.

야외극장이 대부분 신전이 있는 곳에 세워졌던 것도 그 때문이다. 종교적이고 정신적인 통합이 문화적인 통합으로 이어지게 하기 위해서였다. 아크로폴리스 신전 밑에 그 유명한 디오니소스 원형극장이 있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최대 1만7000명의 관객이 앉을 수 있었던 이 극장은 아테네에서 가장 중요한 연극 경연 대회였던 ‘디오니소스 축연’을 개최하기에 이상적이었다.

디오니소스 축연은 3~4월에 걸쳐 5~6일 동안 계속됐는데 마지막 날에 연극 경연이 벌어졌다. 이 연극 경연을 통해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등 고대 그리스의 3대 비극 작가가 탄생됐다.

이디스 해밀턴은 ‘고대 그리스인의 생각과 힘’이라는 책에서 “길고 긴 연극사에서 참다운 비극의 시대는 두 번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리스 비극 시대와 셰익스피어 비극 시대를 가리킨다. 말하자면 역사상 위대한 비극 작가는 아이스킬로스와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등 그리스 3대 작가와 셰익스피어 네 명뿐이라는 것이다.

이 시대에 유독 위대한 비극 작가와 작품이 나올 수 있었던 이유로 그들이 살고 있던 시대를 꼽을 수 있다. 그리스 비극은 기원전 5세기의 시대 산물이다. 아테네가 기원전 480년 살라미스 해전에서 승리하면서 융성한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 3대 비극 작가인 아이스킬로스는 마라톤 전투에 참전해서 싸운 용사였다. 소포클레스는 소년합창단의 선창자로 활약하면서 마라톤 전투의 승리에 감사하는 찬미가를 주도했다. 에우리피데스는 전투가 있던 바로 그날 세상에 태어났다. 셰익스피어 시대도 엘리자베스 왕조가 영국 역사상 가장 융성하던 시절이었다.

비극은 바로 이런 시대적 요청에 의해 인기를 끌 수 있었다. 니체는 자신의 저서 ‘비극의 탄생’에서 “그리스 비극은 민족의 청년기, 민족의 젊은 시절에 유행했다”고 했다. 젊은 날에는 자신감이 강하지만 또한 실패나 격정으로 인해 그만큼 상처도 많기에 위안도 더 필요한 법이다. 젊은 날에는 오히려 비극이 필요하고 장년 이후에는 희극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한편으로는 절정에 오르기까지의 노고를 치하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과정에서 고통받고 희생당한 이들을 위로하는 진혼가가 필요한 것도 융성한 시대에 도리어 비극이 각광을 받은 배경이다. 비극은 페르시아 전쟁으로 찢긴 마음과 사회를 통합하는 묘약이었다.

해밀턴은 “비극은 우리에게 고통을 보여주고 그 때문에 우리에게 기쁨을 준다”며 이를 ‘비극적 기쁨’이라고 표현한다. “괴로움이 더 심하게 묘사될수록, 사건이 더 끔찍할수록 우리의 즐거움은 더욱 강렬하다. 작가가 이런 식으로 보여주는 공연에 의해서 우리의 마음은 강렬한 기쁨을 느낀다.” 인간은 행운의 절정에서 벅찬 기쁨을 느끼지만 또한 비통함도 느낀다. 이게 바로 ‘비극적 기쁨’이다.

마라톤 전투에 참전했던 아이스킬로스는 자신의 전투 경험을 토대로 ‘비극적 기쁨’을 노래한 최초의 비극 작가다. 그는 페르시아 전투에서 승리한 그리스인의 용기와 융성함을 작품에 반영하면서 운명 앞에 거침없이 도전하는 영웅적인 행동을 노래한다. 아이스킬로스의 작품에는 체념이나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이스킬로스는 ‘결박당한 프로메테우스’에서 “인간들을 도와줌으로써 나는 고난을 자초했던 것”이라면서 “후회 없이 나는 현재의 이 불행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마실 것이오”라고 말한다.

아이스킬로스는 영웅적인 용기를 그리는 한편으로 재앙으로 인한 고통을 담아낸다. 마라톤 전투의 용사였던 아이스킬로스는 전쟁의 영광을 벗겨버리고 전쟁이 얼마나 죄악과 비참함을 가져오는지 들려준다.

“참아낼 만한 힘을 넘어선 그런 슬픔이 모든 병사들의…. 집집마다 돌아오는 것은 다 타버린 갑옷과 유해뿐이다.” (‘아가멤논’에서)

아이스킬로스가 쓴 ‘오레스테이아’ 3부작은 트로이 전쟁을 무대로 한 아가멤논 일가의 처참한 배신과 보복, 저주, 살육에 이어 종국에 ‘화해’로 귀결된다.

페르시아 전쟁으로 남편이나 자식을 잃고 가정이 파괴된 그리스 여인들은 아이스킬로스의 비극 공연을 보면서 전쟁으로 덧난 상처를 치유하고 위로받고 또 화해하고 그러지 않았을까. 그렇게 그리스 비극은 당시 페르시아 전쟁으로 찢긴 마음들과 사회를 통합하는 묘약으로 작용했다.

아이스킬로스의 성공에 힘입어 소포클레스와 에우리피데스가 가세하면서 그리스는 비극의 전성시대를 열 수 있었다.

세제스타 원형극장(위), 그리스 델포이 극장 (아래)
[최효찬 자녀경영연구소장·비교문학 박사 / 일러스트 : 정윤정]

 

그리스 비극 ➋모든 비극은 ‘하마르티(판단착오)아’에서 비롯된다
기사입력 2013.09.30 09:09:08 | 최종수정 2013.09.30 09:34:03

오이디푸스를 테베 밖으로 이끄는 안티고네.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고 중요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이런 명제를 던졌다. 시는 보편적인 것을 말하는 경향이 더 강하고, 역사는 개별적인 것을 말하기 때문이라고 그는 부연한다. 비극에서 인물의 행동을 통해 전달되는 연민과 두려움은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주는 현상으로 이어지면서 보편적인 어떤 정신세계로 고양시켜 준다는 것이다. 즉 ‘행복에서 불행으로’ 떨어지는 주인공의 운명을 통해 그 비극이 들려주고자 하는 보편성을 읽어낼 수 있다는 얘기다. 주인공의 저항할 수 없는 운명 앞에는 한 인간이 겪는 ‘중대한 과실’이 반드시 포함돼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주인공의 운명과 관련해 ‘하마르티아(Hamartia)’라는 중요한 개념을 제시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비극적인 주인공의 운명은 불행에서 행복으로 바뀌어서는 안 되고 반드시 행복에서 불행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러나 그 원인은 비행(非行)이 아니라 하마르티아에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비극의 주인공은 악덕이나 비행 때문이 아니라 어떤 과실 혹은 판단 착오 때문에 행복한 삶이 불행을 당해야 하는데 이게 바로 하마르티아다. 이 단어는 궁술에서 나온 것으로 ‘과녁에서 빗나간 것’ ‘표적을 빗맞춘 것’을 뜻한다. 하마르티아를 주인공의 성격적 결함이나 도덕적 흠으로 보기도 한다.

우리 모두는 비극의 주인공이요, 주인공이 겪는 하마르티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누구든 인간인 이상 판단 착오를 할 수 있고 이게 거대한 운명의 바퀴 속으로 빠져들 수 있기 때문이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은 테베의 왕에서 쫓겨나고 자신의 눈마저 찌르는 한 인간의 운명을 노래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오이디푸스 왕을 가장 완벽한 비극 작품으로 보고 대표적인 하마르티아의 예로 오이디푸스 왕을 든다.

이 비극은 테베에 신의 노여움으로 전염병이 창궐해 재앙에 빠지는 것으로 시작한다. 오이디푸스는 전염병을 막기 위해 싸운다. 델포이의 신탁은 페스트라는 재앙이 테베에 내린 것은 이 도시에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욕보임으로써 신들의 분노를 산 사나이(오이디푸스)가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오이디푸스에게 말한다.

“이 땅에서 생기고 키워진 더러운 일이 우리를 파멸시키지 않도록 씻어 없애라.”

더러운 일은 바로 오이디푸스의 친부 살해와 친모와의 결혼이다. 그러자 오이디푸스는 재앙을 유발한 이 사나이를 찾는 데에 전심전력을 기울인다. 그는 그 주인공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짐작하지 못한다. 오이디푸스가 아버지 라이오스를 죽이고 어머니 이오카스테와 결혼한 것이 바로 중대한 과실, 즉 하마르티아에 해당한다. 결국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범인임을 알고 자신의 운명을 원망하면서 스스로 눈을 찌른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그때까지 눈으로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된다. 육체적으로 볼 수 있는 인간이었을 때 눈이 멀었었지만 정작 지금 눈먼 자가 되고서야 제대로 보게 됐다는 것이다.

마지막 코러스(노래)는 이렇게 울려 퍼진다.

“테베 사람들이여, 명심하고 보라. 이이가 오이디푸스이시다. 그야말로 저 이름 높은, 죽음의 수수께끼를 풀고, 권세 이를 데 없던 사람. 아아, 이제는 저토록 격렬한 풍파에 묻히고 마셨다. 그러니 사람으로 태어난 몸은 조심스럽게 운명으로 정해진 마지막 날을 볼 수 있도록 기다려라. 아무 괴로움도 당하지 말고 삶의 저편에 이르기 전에는 이 세상 누구도 행복하다고 하지 마라.”

소포클레스는 이어 ‘오이디푸스 왕’의 속편 격으로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도 썼다. 오이디푸스가 떠나고 난 뒤 테베 왕국의 권력을 놓고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네이케스 두 쌍둥이 아들과 새로운 권력자 크레온이 벌이는 반목과 질시를 다룬 이야기다. 오이디푸스가의 저주는 오이디푸스 자신뿐 아니라 그의 아버지 라이오스 왕, 어머니이자 아내, 그의 두 아들, 나아가 딸 안티고네까지 이어지는데 결국 모두 죽음으로 귀결된다.

누구든 인간인 이상 판단 착오를 할 수 있고 뜻하지 않게 거대한 운명의 바퀴 속으로 빠져들 수 있다.

소포클레스는 조화와 규범, 억제 등 아폴론적인 질서를 중시한 보수적인 작가였다. 그는 운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지라도 “우리에게는 자신의 정신을 지배할 수 있는 내면의 성채가 존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 내면의 성채는 권력자에 대항해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고 목을 매 자살을 택한 ‘안티고네’와 아버지를 살해한 어머니에 대한 남매의 보복살해가 내용인 ‘엘렉트라’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엘렉트라는 아버지의 궁전에서 하녀처럼 살며 분노를 태우지만 정작 ‘그 여자(어머니)’에게 모욕당하면서도 어쩌지 못한다. 그러다 엘렉트라는 남동생인 오레스테스를 만나면서 억눌려 있던 분노를 폭발시키고 어머니를 죽이는 데 적극 가담한다.

“세게 내려쳐. 한 번 더 그럴 수 있다면! 죄를 진 자가 이제 죽었다.”

어머니에 대한 엘렉트라의 복수심에 찬 대사가 가슴을 전율하게 한다.

프로이트가 정신분석학에서 말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에서, 그리고 이에 대비되는 ‘엘렉트라 콤플렉스’는 이 작품에서 유래한 것이다.

엘렉트라는 3대 비극 작가 모두 약간씩 다른 플롯으로 썼는데 비교하며 읽을 만하다. 비극은 가장 잔인한 이야기들의 원형이라는 말이 있듯, 인간의 가장 추악한 밑바닥까지 들춘다. 추악을 통해 선한 인간, 광기를 통해 합리적인 인간이 될 수 있도록, 마치 예방주사를 맞는 것처럼 해준다는 것이다. 이게 비극이 지닌 ‘예방적 치료력’이며 비극이 지닌 최고의 가치라고 니체는 말한다.

그리스의 마지막 비극 작가인 에우리피데스의 ‘바코스(디오니소스의 로마식 표기)의 여신도들’에서는 디오니소스적인 광기를 엿볼 수 있다. 테베의 왕 펜테우스는 새롭게 등장한 디오니소스 신에 대한 경배를 거부한 오만한 행동으로 광란의 디오니소스 축제에 참가한 어머니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된다. 자식을 짐승으로 착각하고 갈기갈기 찢어 죽인 어머니를 보고 관객들은 디오니소스적 광기에 전율하며 그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삶의 광기를 경계했을 것이다.

니체는 비극은 괴로워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빌려 현상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라며 이렇게 말한다.

“보라! 잘 보라! 이것이 그대들의 삶이다. 이것이 그대들 생활의 시곗바늘이다.”

그리스 비극 작가들은 신화에 예술적 상상력을 가미해 인간의 존재를 탐구하고 인간 존재의 밑바닥까지 꿰뚫고 들어가 우리들 실재의 세계, 본질의 세계를 찾으려고 했다. 비극 작가들은 공포와 허무, 무서움에 직면하면서도 이를 아폴론적인 예술로 승화함으로써 디오니소스적인 광기를 정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예컨대 ‘바코스의 여신도들’에서 여성들이 디오니소스 축제에 참여함으로써 가부장적 남성 중심 사회의 내면 깊숙이 자리 잡은 일상적인 규범과 질서를 전복하고자 하는 억제된 충동을 해소할 수 있게 해줬다는 것이다.

그러다 플라톤 시대에 이르러 플라톤은 시인의 모방은 이데아를 모방한 현실의 모방으로 저급한 것이라며 ‘시인 추방론’을 제기한다. 당시 젊은 비극 작가였던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되기 위해 제일 먼저 그의 비극 작품을 불살라 버렸다. 소크라테스주의가 등장하면서 그리스 비극은 몰락하고 이와 함께 신화 시대도 종언을 고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