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자료

북방외교 회고 

길벗 道伴 2013. 10. 17. 16:47

 북방외교 회고
기사입력 2013.10.14 17:26:19 | 최종수정 2013.10.14 19:05:23

1990년대 초 노태우 정부는 북방외교의 기치 아래 소련, 중국, 동구국가와 수교하여 공산권으로 외교지평을 넓혔다. 고르바초프 시대 소련에서 비롯된 탈냉전 흐름을 타고 한국 외교는 서방권 일변도를 벗어나 글로벌 외교를 할 외형을 갖추게 되었다. 같은 시기 한국은 대북관계 개선도 추진하였다. 기본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선언, 유엔 동시가입을 이루어 남북관계도 안정되었다.

그런데 이 상태는 오래가지 못했다. 북한이 맹주 소련의 변질과 지원 중단, 소련과 중국의 대한 수교 등에 충격을 받아 북한식 생존책으로 핵을 택하였기 때문이다. 김일성은 1990년 한ㆍ소 수교와 1991년 한ㆍ중 수교 후 핵카드를 만지작거리다 1993년 초 NPT(핵확산금지조약)탈퇴를 선언했다.

돌이켜보면 노태우 정부의 북방외교는 탈냉전 기류를 활용한 큰 성취이지만, 탈냉전 사고로 북한을 대한 것은 아니었다. 북한의 우방이었던 공산권을 잠식해 들어가는 데는 적극적이었으나, 북한의 서방권 접근을 허용하는 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물론 노태우 정부의 성격이나 당시 우리 사회 국민의 의식상 그런 기대는 무리일 수 있다. 아마도 그 일은 다음 정부의 몫이었을 수 있다. 그런데 북한은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NPT 탈퇴를 하여 핵문제를 격발시켜 버린다. 이 일은 초기 대북관계에 유화적이던 문민정부로 하여금 강경일변도로 가도록 만들어버렸다.

5년 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 북한과 미ㆍ일의 수교를 지지하고 햇볕정책을 추진하였으나, 이미 북한의 핵개발은 더 진전되었으므로 미ㆍ일은 호응할 수 없었다. 국내에서도 북한이 핵개발을 하는데 햇볕정책이 옳으냐를 두고 갈등이 생겼다. 만일 노태우 정부 때 우리의 공산권 수교와 북한의 서방권 수교가 동시 추진되었더라면, 만일 김일성이 핵개발로 급선회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김영삼 정부가 화해를 이어가며 북한과 서방의 관계개선과 경제개발을 권하였다면, 북핵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고, 햇볕정책을 둘러싼 국론분열도 적었을 것이다. 이를 부질없는 가정이라고 할 필요는 없다. 역사의 고비마다 있었던 결정들이 시대정신과 어떻게 엇나갔는지, 대안은 없었는지 돌아보고 오늘의 대처에 교훈을 찾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위성락 주러시아 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