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자료

사랑해…헤어져" 포스트모던 황진이

길벗 道伴 2013. 7. 28. 19:26

"사랑해…헤어져" 포스트모던 황진이

 

우리나라의 역사적 인물 중 황진이만큼 시대와 이데올로기를 초월해 남ㆍ북한 모두에서 대중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아온 사람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생몰 연도조차 불분명한 인물이 이처럼 강력한 역사적 생명력을 갖게 된 것은 황진이의 삶에 내재한 `포스트 모던(post modern)`한 특징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핵심적인 특징은 탈중심적 다원적 사고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여성으로서 황진이만큼 지배적인 사회적 가치에서 벗어나 탈중심적이고 다면적인 삶의 행적을 보여준 이는 일찍이 없었다.

실존 인물이든 허구적인 인물이든 간에 조선시대 여성들은 하나의 고정된 이미지를 갖고 있다.

신사임당은 현모양처(賢母良妻)를 상징하고 춘향은 일부종사(一夫從事)를 대표한다.

하지만 황진이는 다르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황진이는 때로는 남성을 조롱하기도 하고(벽계수), 때로는 남성의 흠모의 대상이 되기도 했으며(임제),

때로는 남성과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기도 하고(이사종), 때로는 남성을 마음속 깊이 흠모하는(서경덕) 입체적인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다.

황진이의 삶에서 가장 독특한 사연 중 하나는 한양 제일의 소리꾼 이사종과 6년간 아름다운 동행을 한 것이다.

 첩의 자식이라는 동병상련의 아픔을 공유할 뿐만 아니라 사람을 알아보는 지인지감(知人之鑑)의 재능을 갖고 있던

두 사람은 첫 만남에 연분(緣分)을 맺었다.

하지만 황진이는 이사종과 만난 후 6년이 지났을 때 자신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그와 결별을 선언하였다.

황진이가 이사종을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사종과 헤어지기로 결심한 황진이의 복잡한 심경을 헤아리기 위해서는 심리학적인 분석이 필요하다.

황진이가 이사종과 헤어지기로 결심한 것은 자기애적인 성격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자기애적인 성격은 자기 자신에 대해 과대하게 큰 가치를 부여하는 성격을 말한다.

황진이가 자기애적인 성격의 소유자라는 점을 확인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송도에 있는 빼어난 것 세 가지를 뜻하는 말로서 박연폭포, 서경덕, 그리고 황진이를 지칭한다.

 재미있는 것은 이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이 바로 황진이 자신이라는 점이다.

자기애적인 성격의 핵심적인 특징은 깨지기 쉬운 유리 같은 자아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자기애적인 사람들이 스스로를 과대 포장하는 이유는 바로 내면의 열등감을 보상하려 시도하기 때문이다.

신분제 사회에서 맹인 기생인 첩의 딸로 태어난 황진이가 여중호걸(女中豪傑)의 행적을 남긴 것 역시 자기애적인 성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황진이의 어머니는 말년에 매독에 걸려 뼈와 살점이 떨어져 나가 썩어 문드러지는 고통 속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때 황진이는 어머니의 치료비를 대느라 이사종에게 커다란 신세를 져야 했다.

황진이는 그 과정에서 자기애적인 손상을 겪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신이 연인에게 부담을 주는 존재가 되었다는 자의식을 경험한 것이다.

동시에 자신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어머니의 끔찍한 최후는 황진이의 취약한 자기애적인 자아를 자극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직업상 어머니의 모습은 자신의 미래 모습이 될 수도 있는데 그러한 모습은 자기애적인 성격의 소유자가 연인에게 절대로 보여줄 수 없는 것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황진이와 이사종은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지는 아픔을 겪었지만 그들의 사랑은 우리나라의 시조시인들이 역대 최고로 꼽는

시조를 남겼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 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

[고영건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