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인드

[신정근의 동양철학 톺아보기] 손자

길벗 道伴 2013. 10. 8. 22:40

❶ 손자병법 쓴 손자 전쟁은 꺼려
기사입력 2013.09.09 09:24:03

손자는 춘추전국시대 병가로 유명한 손무(孫武)를 말한다. 손자는 병가의 성인, 병성(兵聖)이나 무성(武聖)으로 추앙됐고 그의 책은 병법의 성서(바이블), 병경(兵經) 또는 무경(武經)으로 불렸다. 손자와 그의 병법서가 얼마나 유명했던지 우리나라에서는 ‘TV 손자병법’이라는 프로그램이 방영되기도 했다.

흔히 우리는 ‘손자’ 하면 한 사람뿐인 줄 알지만, 사실 손무 외에 또 한 사람이 더 있다. 손무보다 100여년 뒤에 활동했던 그의 후손 손빈(孫臏)도 손자로 알려져 있다.

둘 중 손무가 손빈보다 먼저 활동했고 그의 업적이 손빈보다 더 알려지면서 오늘날 손자 하면 보통 손무를 가리킨다.

손자는 전쟁에서 어떻게든 승리를 거두는 방법을 탐구했다. 전쟁을 연구한 인물인 만큼 우리는 손자가 승리를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은 인물로 생각하기 쉽다. 승리를 거둘 수만 있다면 손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때로는 잔인하고 냉혹한 결정을 내릴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손자병법’을 읽어보면 손자가 전쟁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전쟁광이나 호전론자는 아님을 알 수 있다.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나 살인마는 더더욱 아니다.

그럼에도 왜 우리는 손자 하면 음모, 모략, 살상, 전승(戰勝)의 집착 등 이미지만 떠올리는 것일까? 우리가 전쟁에 대한 선입견을 손자에게 무의적으로 덮어씌운 것일 수도 있다. 이보다 더 주목해야 할 것은 사마천이 ‘사기’에서 손무를 그려내는 방식이다. ‘냉혈한 손자’ 이미지의 기원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냉혈한’ 이미지는 손자에 대한 오해 

사마천의 기록에 따르면 손자는 제나라 출신이었지만 남쪽 오나라를 도와 합려(闔廬)가 당시 패자에 버금갈 정도의 위력을 떨치게 했다. (‘사기’ ‘손자오기열전’)

손자와 합려의 첫 만남은 극적이다. 합려는 일찍부터 손자의 명성을 들었던 터라 그의 병서 강의가 아니라 현장에서의 지휘 능력을 보고 싶었다.

갑작스러운 제의를 받고도 손자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합려의 동의를 받고 그는 궁녀 180명을 불러 모았다. 손자는 군사 훈련의 경험이 전혀 없는 궁녀로 군사 훈련의 시범을 보이겠다는 것이다. 이른바 ‘여군’을 편제했던 셈. 궁에 남성이 적고 여성이 많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는 하지만 어떻게 보면 도전적인 시도였다. 고도로 훈련된 병사도 처음 보는 지휘관 지시를 제대로 수행하는 것이 쉽지 않은데, 군사 훈련을 받아본 적이 없는 궁녀를 데리고 지휘를 행사하겠다는 것. 당연히 주변에서는 실패할 것이라 예측했다.

손자는 180명의 궁녀를 두 편으로 나눴다. 이어서 합려가 총애하는 궁녀 두 명을 각각 한 편의 대장으로 삼았다. 다시 그는 궁녀 전원에게 창을 나눠 준 뒤 훈련을 시켰다. 손자는 궁녀들에게 좌향좌, 우향우 등 기본적인 제식 훈련의 동작을 가르치고 명령대로 따라 할 것을 지시했다.

난생처음으로 군사 훈련을 받는 궁녀인지라 손자가 명령하면 그들은 따라 하지 않고 키득키득 웃기만 했다. 손자는 이런 상황에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군령이 분명하지 않고 구령에 숙달되지 않으니, 이것은 장수의 잘못이다”라며 계속해서 몇 차례에 걸쳐 명령을 내렸다. 그럼에도 궁녀들은 여전히 웃기만 할 뿐 손자의 구령대로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순간 손자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는 “군령이 분명한데도 구령대로 움직이지 않으니 이것은 대장의 잘못이다”라고 말하고 합려가 총애하는 두 궁녀 대장을 참수하려고 했다. 그때까지 옆에서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던 합려가 깜짝 놀라 손자의 조치를 만류하고자 했다.

“당신의 용병술이 뛰어나다는 것을 충분히 알게 됐소. 두 궁녀가 없으면 아무리 좋은 음식을 먹어도 맛을 모르니 제발 죽이지는 마시오.”

손자는 합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두 궁녀를 참수해 본보기를 보였다. 장수가 임금의 명령을 받아 지휘관이 되면 군중에서는 군주의 명령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다. 만약 군주의 명령에 따라 지휘권이 혼란스러우면 전장에서 위계질서는 물론, 장수의 통제 권한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 두 궁녀를 참수하자 나머지 궁녀들은 손자가 구령을 내리는 것에 맞춰 훈련한 대로 착착 움직였다.

다소 충격적인 방식으로 손자는 자신의 용병술을 합려에게 확인시켰다. 이후 오나라 군대는 서쪽의 초나라를 패배시키고 북쪽 제나라와 진(晉)나라를 위협하기에 이른다. 여기서 손자의 역할이 컸다.

‘삼령오신(三令五申)’이란 고사성어는 손자의 군사 시범에서 생겨난 말이다. 장수가 자신의 명령을 병사들에게 완전하게 전달하려면 몇 번이고 익숙해질 때까지 되풀이하란 뜻이다. 전쟁과 같이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는 명령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으면 사고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평소 훈련을 철저히 해야 한다는 뜻도 함축됐다. 사람 간 소통이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손자의 궁녀 참수는 ‘사기’를 읽는 사람에게 그의 잔혹성을 각인시켜줬다. 손자의 행동이 이해되는 점도 있지만 시범 훈련과 자신의 용병술 과시를 위해 참수라는 다소 극단적인 상황까지 몰고 갈 필요는 없었다는 반론도 제기된다.

이런 선입견을 갖게 되면 손자와 그의 병법을 잔혹함으로만 매도하기 쉽다. 하지만 손자병법을 조금만 읽어봐도 이런 예상은 빗나간다.

공자는 ‘논어’ 첫 문장을 배울 학(學) 자로 시작하면서 ‘사람은 배워야 하는 존재’라는 점을 강조했다. 맹자는 첫 문장에서 도덕과 이익의 문제를 날카롭게 대립시켜 이하의 논의가 두 가지 축을 중심으로 진행되리라는 것을 암시한 적이 있다.

손자도 마찬가지다.

“군사 문제는 국가의 중요한 일이다. 죽느냐 사느냐가 갈리는 땅이고, 살아남느냐 망하느냐가 갈리는 길이다. 이러니 군사 문제를 세밀히 살피지 않을 수가 없다(兵者, 國之大事. 死生之地, 存亡之道, 不可不察也. ‘계편’).”

손자가 말하는 군사 문제는 한 번의 승패에 따라 나라가 망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결정될 수 있는 전면전을 가리킨다. 전쟁의 승패는 한 나라 입장에서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전쟁을 하고 말고의 문제가 개인의 감정과 기분에 따라 결정될 수 있는 사안은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손자가 국가 간 분쟁과 갈등을 전쟁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전쟁 만능론자 혹은 전쟁을 통해 승부를 거는 호전론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손자는 전쟁을 아주 신중하고 면밀하게 고려하는 신전론(愼戰論)자다.

손자는 ‘계편(計篇)’에서 전쟁의 엄중성을 밝힌 다음, 전쟁을 결정하기 위해서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사항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다섯 가지 사안에 따라 전쟁을 점검하고 계책으로 비교해 사실(실정)을 살핀다. 다섯 가지 사안 중에서 첫째가 명분이고, 둘째가 자연조건이고, 셋째가 지형지물이고, 넷째가 장수이고, 다섯째가 군율이다(故經之以五事, 校之以計, 而索其情. 一曰道, 二曰天, 三曰地, 四曰將, 五曰法.).”

손자는 무엇보다 사실에 근거하는 ‘색정(索情)’을 강조했다. 전쟁에 대해선 아주 신중하게 따져 결정하고 그 결정을 위한 명확한 근거를 확보하는 데 주력한 전략가다. 사마천이 ‘사기’를 통해 보여준 손자의 ‘참수’ 이미지에서 벗어나야 우리는 손자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법’ 제시

한 분야의 전문가로 알려지면 그 사람은 그 분야를 대표하는 사람으로 여겨지기 마련이다. 오늘날 우리는 스티브 잡스를 IT업계를 대표했던 사람으로 간주한다. 손자는 예나 지금이나 병법에서 일가를 이룬 무성(武聖)으로 평가를 받는다. 이 같은 논리를 적용하면 손자는 ‘백 번 싸우면 백 번 모두 이기는’ 위대한 전략가이자 지휘관으로서 불패의 신화를 일군 사람으로 생각될 수 있다. 물론 맞는 말이다.

하지만 손자의 위대성은 싸우기만 하면 반드시 이기는 필승의 보증 수표에만 있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보통 사람들은 손자병법을 읽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보통 사람들이 모두 군대에 가는 것이 아니고 누군가 군대에 가더라도 그 사람이 군사 전략을 수립하는 위치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자병법은 고전이자 반드시 읽어야 할 책으로 평가받고 있다. 우리가 병법을 전공으로 할 처지가 아니라면 도대체 왜 손자병법을 읽어야 하는 것일까? 손자병법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복잡할 것 같은 이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우리가 학창 시절에 영어와 수학을 배웠지만 그 분야 전문가가 된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영어를 쓰는 사람을 만나 대화하기 위해서 영어를 배웠으며, 수학적 사고를 익히기 위해 수학을 배우고 문제를 풀었다.

마찬가지로 손자병법도 병법의 달인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손자병법의 사고를 익히기 위해서 읽는다. 이런 연유로 인해 손자병법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읽어야 하는 책이다. 많은 사람들은 손자병법을 읽으면서 그 안에 담긴 사고방식을 배울 수 있다.

질문을 바꿔보자.

“우리가 왜 손자병법을 읽어야 하는가”에서 “손자병법에서 어떤 사고방식을 눈여겨보면 좋을까?”로.

이 물음에 답을 찾으려면 손자가 활약했던 춘추전국시대의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춘추전국시대 이전 중원 지역에는 모두 140여개의 나라가 있었다. 철제 무기가 등장하고 농업 생산이 늘어나면서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침략해 자신의 영토로 만드는 현상이 일어났다.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집어삼킨다는 점에서 약육강식(弱肉强食)이라고 하고, 약한 나라의 땅을 자국의 영토로 편입한다는 측면에서 멸국치현(滅國置縣)이라 부르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약한 나라는 물론 강한 나라도 상대에게 멸망당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노력했다. 춘추전국시대 나라들은 처음엔 생존을 위해, 나중에는 번창을 위해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군사적으로 강한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주요 전략으로 채택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상앙이나 한비 등 법가는 부국강병을 추진하기 위해 군주를 권력의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을 이루고자 했다. 법가의 전략은 당시 공자나 노자를 위시한 유가와 도가의 주장보다 큰 호응을 받았다. 그들은 적의 침략을 이기고 먼저 적을 공격하기 위해 법을 중심으로 사회를 새롭게 조직하는 기술을 제공했다. 당장 살아남아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미래는 내다볼 여유가 없었다.

법가의 전략은 꽤 유효했지만 모든 나라에 공통으로 적용될 수는 없었다. 물론 부국강병을 꾀하면 살아남을 가능성은 커진다. 하지만 약한 나라가 부국강병의 목표를 달성하면 상대적으로 강한 나라가 불리해지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결국 강한 나라는 자신의 적이 부국강병에 성공하기 전에 전쟁을 미리 벌인다. 약한 나라가 아무리 부국강병 전략을 신속하게 추진한다 한들 실현이 쉽지가 않다. 상대가 가만히 있지 않는 이상 불리한 상황에서 상대의 위협에 직면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렇다면 부국강병을 하건 말건 상황은 이미 결정돼 있으니까 약한 나라의 군주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면서 사치와 향락으로 시간을 보내야 하는 걸까? 법가에 따르면 토끼와 거북이의 시합처럼 약한 나라는 강한 나라를 따라잡을 수 없다.

여기서 손자는 법가와 다른 길을 선택했다. 약한 나라도 자신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강한 나라를 이길 수 있다는 발상의 전환을 시도했다. 누구나 희망사항을 말할 수 있지만 현실에서 실현하기가 쉽지 않다. 손자는 단순히 희망사항에 그치지 않고 현실에서 가능하게 하는 길을 제시하고 실제로 구현했다. 예나 지금이나 분야를 넘어 손자를 존경하는 이유다.

때로는 실제 전력의 반만 드러내라

손자의 제안대로 약한 자가 강한 자를 이길 수 있는 길을 살펴보자. 우선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해야 한다.

“싸움을 잘하는 자는 적을 조종하지, 적에게 조종당하지 않는다.” (善戰者, 致人而不致於人. ‘허실(虛實)’)

국력이 월등하게 차이 나지 않으면 누구든지 쉽게 싸움을 걸려고 덤비지 않는다. 힘의 균형이 한쪽으로 완전히 기울었다고 생각하면 공격을 하려고 할 것이다.

이를 활용하려면 실제 나의 전력을 100% 드러낼 것이 아니라 50%만 드러내 상대에게 자신이 유리하다고 판단하게 할 수 있다. 상대가 내 50% 전력을 전부로 판단해서 침략을 하면 우리는 드러난 50%와 숨긴 50%를 합쳐 적에게 커다란 타격을 줄 수 있다.

이 작전은 약소국에도 유용하다. 1000명의 병사가 1만명의 병사와 평원에서 정면으로 싸운다면 백이면 백, 1만명의 병사가 승리를 거둘 것이다. 만약 전장을 평원에서 산악으로 바꾼다면 어떨까? 평원에서 싸우다 지는 척하며 산으로 도망가면 1만명의 병사는 추격할 것이다. 하지만 산에서는 많은 병사를 한꺼번에 움직일 수 없으므로 병력을 쪼개야 한다. 병력이 나뉘면 1000명의 병사로도 작은 단위로 쪼갠 1만명의 병사와 대등하게 싸울 수 있다.

이것은 형세가 늘 고정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군사의 움직임은 물을 닮았다. 물은 흐르면서 높은 곳을 피해 아래로 나아간다. 군사의 움직임도 대비하는 곳을 피해 빈 곳을 친다. 물은 땅에 따라 흐름을 조절하고 군사는 적에 따라 승리를 조절한다. 그러므로 군사에는 불변의 형세가 없고 물에는 불변의 형상이 없으니 적에 따라 변화해 승리를 거두는 것을 일러 신묘하다고 한다.” (夫兵形象水. 水之行, 避高而趨下. 兵之形, 避實而擊虛. 水因地而制流, 兵因敵而制勝. 故兵無常勢, 水無常形, 能因敵變化而取勝者, 謂之神. ‘허실’)

교범과 매뉴얼을 숙지할 필요는 있다. 하지만 상황에 따라 기민하게 변경해 그때그때에 맞게끔 대처할 응용력도 중요하다는 게 손자의 생각이다.

손자는 통상적인 규칙과 상황에 따른 기민한 변화를 ‘정(正)’과 ‘기(奇)’라는 말로 표현했다. 정은 아군과 적군이 서로 어떻게 나올지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이다. 반면 기는 내가 어떻게 할지 상대가 전혀 알 수 없는 것이다. 손자는 정만 써서도 안 되고 기만 써서도 안 된다고 본다.

“전투의 형세는 정과 기를 넘어서지 않는다. 정과 기의 변화는 무궁무진하다. 이처럼 기와 정이 서로 도움을 주는 것이다.” (戰勢不過奇正, 奇正之變, 不可勝窮也. 奇正相生.)

손자가 말하는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려면 실제로 싸움을 하는 병사만큼이나 싸움을 지휘하는 장군의 역량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런 장군의 상을, 적벽대전의 제갈량이나 명량해전의 이순신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은 군사가 적다고 싸우기 전에 ‘패배’를 자인하지 않았다. 상황을 변화시킴으로써 아무도 예상치 못한 승리를 일궈냈다.

 

 

 

➌ 전국시대 논리에 부합한 손자의 기만술
기사입력 2013.09.30 09:10:58

손자병법을 읽으면 눈을 번쩍 뜨게 만드는 구절을 자주 만난다.

“군사는 속임수이다.” (兵者, 詭道也. ‘계(計)’)

“군사는 기만으로 이뤄지고 이익으로 움직인다.” (兵以詐立, 以利動. ‘군쟁(軍爭)’)

거짓말, 사기, 속임수 등 기만술을 주장하는 내용을 보면 가끔씩 놀라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해가 된다. 아무리 전쟁터라도 지켜야 할 규칙이 있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 때도 있지만 전쟁은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점에서 기만술도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후자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손자병법의 핵심을 다음처럼 해석하기도 한다.

“ ‘설익은 정도’를 통해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키는’ 전쟁 이념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온갖 속임수와 편법을 모두 동원해 승리를 쟁취하는 데 있습니다.” (마쥔 지음, 임홍빈 옮김, ‘손자병법 교양강의’)

이 해석에 따르면 손자는 전승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고 어떤 금도(윤리) 또한 없다고 주장한 인물이다. 이 논리대로라면 우리는 전승(성공)을 위한 온갖 편법과 기만술을 배우기 위해 ‘손자’를 읽는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승리지상주의를 강조하는 이런 통속적 독법은 손자병법의 본령을 드러내기보다 오히려 왜곡한다. 손자의 ‘기만술’은 속임수 자체에 초점이 있지 않고 새로운 전쟁관을 밝히는 맥락에서 살펴봐야 하기 때문이다.

두 종류의 전투 양상을 살펴보자.

먼저 춘추시대 송나라와 초나라가 홍수(泓水)에서 벌였던 전투다. 송나라 양공은 먼저 전장에 도착해 전열을 정비했다. 그때 초나라 군대는 막 홍수를 건너는 중이었다. 송나라 사령관이 초에 대한 공격을 건의했지만 양공은 그것을 묵살하고 초나라 군대가 홍수를 건너 전열을 갖출 때까지 기다렸다. 전투는 송나라의 패배로 끝났고 양공도 큰 부상을 입었다.

이 실화는 ‘양공의 인(襄公之仁)’이라는 고사의 출처다. 전쟁이 끝난 뒤 송나라 사람들은 양공의 처사를 비판했다. 이에 양공은 “부상병을 공격하지 않고 반백의 병사를 사로잡지 않는다”는 군자의 전쟁론을 설파했다. (‘좌씨전’, 희공 22년)

다음은 진나라 상앙(商鞅)이 효산을 장악하기 위해 위나라 공자 앙(央)과 벌였던 전투다. 상앙은 원래 위나라 출신이었지만 출세를 위해 진나라로 가서 장군이 됐다. 이전엔 공자 앙과 가까운 사이였다. 전장에 도착하자 상앙은 공자 앙에게 편지를 보냈다.

“저는 원래 당신과 친한 사이였습니다. 지금 서로 두 나라 장군이 됐지만 어떻게 서로 공격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과 직접 만나 맹약을 맺고 즐겁게 마시며 진과 위나라가 전쟁을 벌이지 않고 평화롭게 지내도록 합시다.” (‘사기’ ‘상군열전’)

공자 앙은 상앙의 편지를 그대로 믿고 맹약을 맺었다. 둘이 함께 술을 마시던 중 상앙은 매복 중인 병사들을 동원해 공자 앙을 사로잡았다.

훗날 홍수 전투의 송 양공은 어이없는 패전으로 비웃음거리가 됐고, 효산 전투의 상앙은 친구를 속여 승전을 거둔 일로 비난받았다. 왜 그랬을까?

두 사례는 춘추시대에서 전국시대로 넘어가면서 바뀌는 전쟁관을 대변한다. 춘추시대는 여러 악(惡)한 세력 혹은 사람들을 정벌하기 위한 전쟁을 펼쳤다. 양공이 얘기했던 교전 수칙을 준수했다. 반면 전국시대는 각 국가가 생존을 위해서 총력전을 펼치던 시기다.

양공은 춘추시대 관점에서 올바른 전투 태도를 보여줬다. 그러나 그런 태도는 전국시대 관점에서 보면 어리석기 그지없다. 반대로 상앙은 전국시대 전쟁관에 충실했지만 춘추시대 기준에선 그저 냉정하고 잔인한 사령관이었던 것이다. 특정 시대의 관점으로 다른 시대의 전쟁을 비판하면 사태를 왜곡할 수 있다.

상앙과 공자 앙이 벌인 효산 전투를 다시 보자. 두 사람 모두 승리를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상앙은 싸우지 않거나 아군 희생을 최소화하면서 승리하기 위해 친구를 속이는 지략을 구사했다. 만약 공자 앙이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때를 대비해 다른 작전도 준비했을 것이다. 춘추시대였다면 상앙은 교전 수칙의 금도를 어겼다는 점에서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전국시대면 얘기는 달라진다. 공자 앙은 상앙의 제안을 수용한다고 해도 그가 노리는 수, 즉 기만술도 충분히 간파해야 하지 않았을까? 전국시대 관점에서 상앙은 승리를 위해 모든 계략을 짜낸 반면, 공자 앙은 친구의 우정만을 믿고 다른 전략 수립은 소홀히 한 패전장군에 불과하다.

손자의 ‘군사는 속임수이다’는 효산 전투에서 나타난 상앙의 기만술을 병법으로 그대로 끌어들인 말이다. 이때 기만술은 보편적인 거짓말처럼 도덕적 비판의 대상이 아니다. 위급한 전쟁 상황에서 상대를 오판하게 만드는 지략(智略)의 일종이 된다. 이런 지략을 잘 짜서 제대로 써먹는다면 승리의 확률은 당연히 높아진다.

손자는 언제 어떤 상황에서라도 기만술을 펼치며 거짓말하고 상대방에게 피해를 입혀도 된다는 식의 주장은 하지 않았다. 그는 철저히 전쟁 중 적이 아군 움직임과 작전을 전혀 간파할 수 없도록 해 주도권을 장악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기만술을 펼쳤다. 일반적으로는 기만술이 마치 전가의 보도나 만병통치약이 되는 것처럼 풀이하는데 이는 손자병법의 본질을 왜곡하는 것이다. 이제 손자가 도대체 어떤 궤도(詭道), 사(詐)의 기만술을 펼치려고 하는지 살펴보자.

‘군사란 속임수이다’라는 말에 이어 손자는 기만술의 실체를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아군이 잘할 수 있지만 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고, 아군이 무엇을 쓰고 있지만 쓰지 않는 것처럼 보이고, 아군이 가까이 있지만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이고, 아군이 멀리 있지만 가까이 있는 것처럼 보이고, 적에게 유리한 상황을 보여서 끌어들이고, 적을 혼란시켜서 아군이 실익을 취한다. 적이 충실하면 아군이 대비하고 적이 강하면 아군이 피하고, 적을 성나게(흥분하게) 만들어 흔들리게 하고, 아군이 스스로 낮추어서 적이 교만하게 하고, 적이 편안하게 상황을 만들어 힘들게 하고, 적이 이웃과 친하면 사이를 떼어놓는다.” (故能而示之不能, 用而示之不用, 近而視之遠, 遠而示之近, 利而誘之, 亂而取之, 實而備之, 强而避之, 怒而撓之, 卑而驕之, 佚而勞之, 親而離之.)

여기서 기만술은 상앙이 효산 전투에서 발휘했던 맥락과 동일하다. 준비 안 된 상황에서 아군의 약점을 드러내 적의 공격을 받지 않는다. 아군의 강점은 공격할 때까지 감춘다. 적이 강하면 정면 승부를 피하고 온갖 방법을 사용해 적의 전력을 약하게 만든다.

손자는 기만술의 결론을 다음과 같이 내린다.

“대비하지 못한 곳을 공격하고 뜻하지 않은 것을 내놓는다. 이것이 병가에서 승리를 거두는 길이므로 먼저 적에게 알려지도록 해서는 안 된다.” (攻其無備, 出其不意. 此兵家之勝, 不可先傳也.)

춘추시대 전쟁은 서로 전력을 드러내놓고 각자 기량을 겨루는 기예의 성격을 지녔다. 전국시대 전쟁은 서로의 전력을 끊임없이 탐색하면서 무조건 승리를 목적으로 하는 자기 보존의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손자는 아군 전력을 숨기면서 상황에 따라 약하게 보여 자신을 얕잡아 보게 만들어 이를 이용했다. 때로는 강하게도 보여 자신을 넘보지 못하게 만들고자 했다.

손자는 간자(間者), 즉 스파이의 필요성을 알고 적군과 아군의 전력을 파악하기 위한 정보의 가치를 중요시했다. 실제 전투가 벌어지기 이전에 이길 수 있는 상황을 미리 조성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이런 방식으로 손자는 속임수, 사기 등의 기만술을 전승을 가능케 하는 조건 중 하나로 본 것이다.

 

 

4. 승패는 싸우기 전에 결정된다

 

춘추전국시대 당시 제자백가 중에 ‘추연(鄒衍)’만큼 제후들에게 환대를 받은 이가 드물다. 추연이 온다고 하면 제후조차 빗자루를 들고 청소한다고 법석을 떨 정도였다. 추연은 음양과 오행의 운행을 계산해서 어느 나라가 뜨고 누가 전쟁에 패할 것인지 신빙성 있는 예측을 내놓았다. 아무리 왕이라도 미래 예측은 어쩔 수 없는 만큼 추연의 말 한마디는 엄청난 파급 효과를 갖고 있었다.

평화로운 시대에도 정보와 지식은 불안한 미래를 걷어내는 힘을 갖고 있다. 하물며 전시 상황에서의 불안함은 평시보다 훨씬 커진다.

손자는 결과를 장담할 수 없고 한순간에 전황이 바뀔 수 있는 전쟁의 불확실성과 불투명성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전쟁은 원래 그런 거야!”라며 불확실성에 상황을 맡기진 않았다. 전쟁에 관련된 변수를 최대한 통제해 승리의 가능성을 높이고자 했다.

‘지전(知戰)’이란 말에서 나타난 것처럼 전쟁은 영웅 무용담이나 특정 용사의 독무대만 그리는 낭만적인 얘기가 아니다. 고도의 지성을 바탕으로 한 치밀한 작전과 엄밀한 계산이 필요하다. 따라서 전쟁의 학문화, 즉 군사학을 점점 필요로 했다. 손자는 지전을 체계화한 사람들 중 한 명이다.

‘손자’는 모두 6200여자로 된 책이다. ‘논어’가 1만자가 넘는 것을 보면 손자의 분량이 많다고 할 수 없다. 이 중 접속사나 대명사 등 문법적 역할은 있지만 뜻이 없는 이(而), 자(者), 지(之) 등이 적게는 180여회, 많게는 330여회 쓰인다. 문법적 역할도 있고 뜻도 있는 단어로는 지(知)가 79회, 계(計)가 11회, 식(識)이 2회, 모(謀)가 11회, 병(兵)이 73회, 승(勝)이 84회, 군(軍)이 61회, 리(利)가 52회, 해(害)가 7회, 공(攻)이 33회, 수(守)가 13회, 인(仁)이 3회, 사(詐)가 1회, 궤(詭)가 1회, 기(欺)가 0회, 정(正)이 8회, 기(奇)가 6회씩 쓰인다. 50회가 넘으면 빈도수가 비교적 높은 것으로 분류된다.

빈도수를 통해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 손자는 변칙과 기만술을 말하지만 그와 관련된 어휘를 빈번하게 쓰지는 않는다. 둘째, 군사 운용, 전승과 관련된 어휘를 많이 사용한다. 셋째, 지전(知戰)과 관련된 어휘를 자주 사용하고 있다.

손자는 병법의 목적이 지전, 즉 전쟁의 확실성을 높이기 위함이라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던 셈이다.

손자는 어떻게 속성 자체가 불확실한 전쟁의 확실성을 높일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그는 먼저 전쟁 결과를 예측 가능한 것이라 생각했다. 전쟁의 승패는 ‘싸워봐야 아는 것’이 아니라 ‘싸우기 전에 결정되는 것’이라고 봤다.

“아직 싸우지 않았지만 작전회의에서 승산이 있으면 실제로 승리할 가능성이 높다. 아직 싸우지 않았지만 작전회의에서 승산이 없으면 실제로 승리의 가능성은 낮다. 승산이 많으면 이기고 승산이 적으면 진다. 하물며 아무런 승산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나는 이를 바탕으로 승부를 미리 내다볼 수 있다.”

당시 출전하기 전에 왕실 종묘에서 작전회의를 하고 출정을 보고했는데 이를 ‘묘산(廟算)’이라고 했다. 묘산은 오늘날의 시뮬레이션처럼 아군과 적군의 모든 전력을 객관적으로 산정하고 전쟁의 승패를 엄밀하게 따지는 검증 절차다. 손자는 현장에서 전투를 벌이기 이전에 결과를 미리 예상해 전쟁의 확실성을 높이고자 했다.

손자는 전시 상황에서 여러 변수를 어떻게 통제하고자 했을까? 아무리 묘산이 좋게 나온다고 하더라도 전쟁은 엄청난 물자가 소요되며 상황에 따라 전황이 수시로 바뀔 수가 있다. 이와 관련해 손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처음에 유리하더라도 나중에 패할 가능성이 많아진다고 봤다. 전쟁을 오래 끌면 정예병도 약해지고 물자도 바닥나기 때문이다.

“전쟁이 서투르더라도 빨리 끝을 봐야지 교묘하게 오래 끄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 전쟁을 질질 끌어서 나라에 이익이 되는 경우는 아직 없었다. 용병의 해로움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용법의 이로움도 제대로 알 수가 없다.”

손자는 ‘졸속(拙速)’과 ‘교구(巧久)’라는 말을 묘하게 대비시키면서 전쟁의 조기 종결을 주장했다. 물론 전쟁을 오래 끌어서 이길 수가 있다. 하지만 오래 끌게 되면 그만큼 전쟁에 변수가 끼어들 가능성이 많아진다. 동맹에 균열이 생길 수가 있고 내부 분열이 발생할 수 있는 식이다. 전쟁 비용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손자는 다음과 같은 말로 결론을 내린다.

“전쟁은 승리가 중요하지 오래 끄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 전쟁을 아는 장수(지휘관)는 백성의 생명을 지키고 국가 안위의 기둥이 된다.”

손자는 전승의 예측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 지전(知戰)이자 지병(知兵)이라고 생각했다. 원래 불확실한 속성을 가진 전쟁에 온갖 변수가 작용하면 불확실성은 더욱 늘어난다. 이것은 전쟁을 모르고 전쟁을 벌이는 것이다.

손자는 전쟁에서 불확실함과 우연성이 끼어드는 것을 최대한 배제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특히 군주의 간섭을 강력히 반대했다. 군주는 지위가 장군보다 위에 있으므로 자신의 위신, 자존심, 명예, 감정에 따라 간섭할 수 있는데 그렇게 되면 전쟁의 불확실성은 늘어난다. 양공의 사례에서 나타나듯 군주 혼자 전쟁을 망칠 수도 있다는 게 손자의 생각이었다.

이와 관련 손자는 전쟁을 망치는 군주를 3가지 유형으로 나눴다.

첫째, 군주가 군대가 나아갈 수 없는 걸 모르면서 ‘앞으로 돌격!’ 명령을 내리거나, 물러날 수 없다는 걸 모르면서 ‘후퇴!’ 명령을 내리는 유형. 둘째, 군사(軍事)를 모르면서 군정(軍政)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 셋째, 군권(軍權)을 모르면서 병사의 임무를 부여하려는 상황 등이다. 손자는 군주가 군사를 지휘하는데 이 세 가지 측면을 모르고 전쟁에 개입하면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송나라 양공이다. 중국 춘추 시대에 패자를 꿈꿨던 송나라의 양공이 정나라를 침범하자 정나라를 구하려고 초나라가 대군을 파병했다. 양공은 초나라와 홍수(泓水)를 사이에 두고 대치했는데 송나라 군사가 먼저 도착해 전열을 가다듬는 동안에도 초나라 군대는 아직 강을 건너지 못했다. 양공은 이런 적을 불쌍히 여겨 그들이 모두 건널 때까지 기다린 후 싸웠다. 하지만 전투에서 패했고 이는 세상의 비웃음을 샀다. 이를 후세 사람들은 ‘양공지인(襄公之仁)’이라 불렀다. ‘양공의 쓸데없는 인정’이란 뜻이다.

당시 양공 밑에서 군사를 지휘했던 사령관은 이를 두고 “(양공이) 아직 전쟁을 잘 모른다(君未知戰)”라고 했다. 사령관과 양공이 생각하는 전쟁이 전혀 달랐다는 말이다. 비록 사령관이 전쟁을 잘 알았지만 양공을 군주로 모신 탓에 송나라는 전투에서 패배했다.

다음은 손자의 대표적인 주장이다.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우더라도 위태로워지지 않는다. 상대를 모르고 나를 모르면 싸울 때마다 위태로워진다.”

“전쟁을 잘하는 자는 불패의 땅에 서서 적의 패배를 놓치지 않는다.”

결국 지전(知戰)해야 선전(善戰) 즉, 잘하는 전쟁이 되고, 결과적으로 전쟁에서의 불확실성을 최대한 줄일 수 있다는 얘기다.

 

 

 

손자 ➎ 공자의 예(禮)와 손자의 이(利)는 같은 이치
기사입력 2013.10.14 08:50:43

춘추전국시대에 활동했던 여러 사상가와 학파를 합쳐 ‘제자백가(諸子百家)’라고 한다. 제자백가에서 ‘제’와 ‘백’은 복수를 나타낸다. ‘자’는 공자와 노자에서 보이듯 사상가 개인을 말하고, ‘가’는 유가와 도가에서 알 수 있듯 학파를 가리킨다.

공자와 손자는 각각 유가(儒家)와 병가(兵家)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두 사람은 다른 학파를 대표하는 만큼 물과 기름처럼 상반된 주장을 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사실 두 사람은 제자백가로서 같은 시대를 풍미한 만큼 같은 점도 있을 법한데, 왜 상극의 인물처럼 보이는 것일까? 맹자가 제자백가를 정통과 이단으로 나누고 유가 이외의 다른 학파에 대해 강한 배타의식을 드러낸 점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맹자는 제자백가 중에서도 감정의 가치를 찾아낸 것으로 유명하다. ‘감정’ 하면 보통 화내고 미워하고 질투하는 것을 떠올리면서 그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맹자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거악(巨惡)에 공분하고 비행에 부끄러워하는 감정이 도덕으로 이어지는 길에 주목해서 ‘성선의 도덕 감정’을 찾아냈다. 또한 맹자는 제자백가 중에서도 다른 학파에 대해 감정적 표현을 숨기지 않았다.

“요즘 군주를 섬기자는 사람 중에 ‘나는 군주를 위해 토지를 개간하고 창고를 가득 채우거나 다른 나라와 맹약을 맺고 전쟁하면 반드시 승리한다’라고 하는데, 그들은 오늘날 좋은 신하(전문가)로 부를지라도 옛날에는 백성을 해치는 민적(民賊)일 뿐이다.” (‘고자’ 하)

맹자는 이런 사고를 바탕에 깔고 있기 때문에 당시의 병가, 종횡가, 법가를 극단적으로 혐오하고 극언을 서슴지 않았다.

“전쟁을 잘하는 자는 극형으로, 제후를 합종과 연횡으로 엮으려는 자는 다음의 형벌로, 황무지를 개간해 세금을 늘리려는 자는 그 다음의 형벌로 처벌해야 한다.” (‘이루’ 상)

맹자는 손자의 ‘지전(知戰)’과 ‘선전(善戰)’이 배울 만한 것이 아니라 백성에게 해를 끼치므로 극형으로 금지해야 하는 학문이라고 주장했다. 맹자의 관점이 너무 강하게 투영되면서 손자의 학문 활동은 긍정적인 가치를 가진 것으로 평가받지 못하게 됐다.

공자도 맹자처럼 손자가 목표로 했던 ‘지전’과 ‘선전’의 가치를 송두리째 부정했을까?

공자가 위나라 영공(靈公)을 만난 적이 있다. 공자는 영공이 자신에게 예악이나 도덕과 관련된 인문학 이야기를 꺼낼 것을 기대했다. 영공은 공자에게 전장에서 병사를 배치하는 진법(陣法)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영공의 질문에 실망이 컸던 공자는 “제기를 차리는 예의를 배웠지만 군대를 운영하는 일을 배운 적이 없다(‘위령공’)”며 차갑게 대꾸했다.

이 사실을 통해 우리는 공자가 병학(兵學)에 관심이 없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가 군사적 해결을 완전히 부정했다고 확대 해석해서는 곤란하다.

자로가 공자에게 삼군을 지휘하는 총사령관이 되면 누구와 함께 하겠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술이’). 앞서 영공에게 했던 대답대로라면 “내가 총사령관이 될 일도 없을 텐데 그런 쓸데없는 질문을 왜 하느냐”고 자로를 질책하지 않았을까 상상해볼 수 있다. 하지만 공자는 눈치 없는 제자를 질책하지 않았다.

춘추시대 제(齊)나라는 공자의 조국 노나라 이웃에 있으면서 종종 노나라를 침략하곤 했다. 이때 제나라 대부 진성자(陳成子)가 제후 간공(簡公)을 살해하는 반란이 일어났다. 공자의 사고방식에 따르면 이는 하극상으로서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 하는 패륜 사건이다. 실제 공자는 반란 소식을 듣고 이웃나라의 일임에도 불구하고 노나라가 제나라에 군사 개입을 해서 패륜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자는 영공에게 크게 실망했던 탓에 병학에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지만, 평소 한 국가의 생존과 도덕적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군사에 결코 냉담하지 않았다.

논어와 손자를 겹쳐 읽어보면 두 사람 사이의 공통점을 찾아낼 수 있다. 더불어 손자가 논어를 꽤 충실히 읽으면서 자기 방식으로 공자의 사고를 계승, 발전시키고 있는 측면을 찾아낼 수 있다.

자로가 공자에게 전군을 지휘하면 누구와 함께 하겠느냐고 물었다는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자로는 공자가 자신과 함께 하려 한다고 대답하길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공자는 자로의 기대를 차갑게 저버리며 다음의 조건을 제시했다.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려잡으려다 물려 죽거나 맨몸으로 강을 건너려다 허무하게 빠져 죽어도 후회하지 않을 사람과 나는 함께 하고 싶지 않다. 반드시 할 일을 앞에 두고 두려워하고 미리 꾀(전략)를 내서 일을 잘하려는 이와 함께 할 것이다.” (‘술이’)

공자는 군대를 지휘하려면 무턱대고 덤비거나 용기만 앞세울 것이 아니라 일을 신중하게 처리하고 사전에 다양한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고 봤다. 공자의 말 중 주의할 만한 개념이 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호모(好謀)’다.

손자도 공자와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

“최선의 병법은 전략으로 이기고 다음은 외교(동맹)로 이기고 다음은 군사력으로 이기고, 최하의 방법은 적의 성을 공격하는 것이다.” (‘모공’)

공성전은 이기든 지든 아군의 막대한 희생을 피할 수 없는 물리적인 직접 충돌이다. 공성전보다 군사력, 외교력을 통한 해결 방법이 낫지만 그것도 최선은 아니다. 최선은 전략을 통해서 전쟁을 억지하고 또 적으로 하여금 전의를 일으키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손자는 이런 사고를 ‘벌모(伐謀)’라 했고 달리 ‘모공(謀攻)’이라고도 했다.

여기서 우리는 공자와 손자의 공통점을 찾아낼 수 있다. 공자의 ‘호모’가 손자에게서 ‘벌모’와 ‘모공’으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공자가 ‘호모’를 말하면서 손자가 일궈낸 병학의 모든 지식을 염두에 두지는 않았을 터. ‘모(謀)’의 개념을 통해 두 사람은 일을 감정대로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지략을 짜내야 한다는 점을 공유했던 것이다.

감정의 절제에 대해서도 두 사람 생각은 비슷하다. 손자는 전쟁이 감정이나 기분이 아니라 철저하게 이해득실에 따라 결정돼야 한다고 봤다.

“이익이 아니면 군사를 움직이지 않고 가능성이 높지 않으면 군사를 쓰지 않고 위험이 없으면 결코 싸우지 않는다. 군주는 분노 때문에 군사를 일으켜선 안 되고, 장군은 화 때문에 전쟁을 벌여선 안 된다. 이익에 맞으면 움직이고 이익에 맞지 않으면 그친다. 망한 나라는 다시 살릴 수 없고 죽은 사람도 다시 살릴 수 없다. 그래서 밝은 군주는 전쟁에 신중하고 뛰어난 장군은 깊이 경계한다. 이것이 나라를 편안하게 하고 군대를 온전히 하는 길이다.” (‘화공’)

이 구절은 사람이 공동의 규칙을 준수하도록 노력한다는 ‘극기복례(克己復禮)’의 유명한 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공자는 극기복례의 실천을 위해서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듣지 말고, 말하지 말고, 움직이지 말라!(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 ‘안연’)”고 했다.

공자의 예(禮)가 손자에서 이(利)로 바뀌었을 뿐이지, 두 사람의 말은 문장 구조가 같고 일시적인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절제를 말한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이를 공자는 합례(合禮), 손자는 합리(合利)라고 표현했다.

보통 학파 구분에 사로잡혀 공자와 손자는 같은 점이 없는 견원지간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두 사람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의외로 서로 통하는 점이 있다. 손자는 진영(학파) 논리에 빠지지 않고 자신의 학문을 일구기 위해 공자의 사상을 자기 식으로 새롭게 해석해냈다

 


 

[신정근 성균관대 동양철학과 교수 / 일러스트 : 정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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