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음악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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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3.10.16 17:48:16 | 최종수정 2013.10.16 17:52: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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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우리들의 뮤지컬은 너무 살벌하다. 아름다운 노래 대신 서로에게 말 폭탄을 쏘아대고, 북을 쳐야 하는 손으로 친구를 치고, 춤 대신에 격한 몸싸움이 난무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다시 노래를 불러야 한다.
어느 날 친구가 찾아와 "아들이 어찌나 속을 썩이는지, 앉혀놓고 말이라도 하자면 내빼버린다"고 하소연했다. 필자는 "요즘 아이들이 즐겨 듣는 노래를 알아보고, 열심히 노래를 익혀 아들이 TV를 볼 때 몇 소절이라도 흥얼거려 봐"라고 했다. 필자의 제안이 먹혔다. "아빠! 어떻게 그 노래를 알아?"라며 빠싹 다가와 앉았다. 그동안 말 좀 하자고 아무리 구슬려도 쳐다보지도 않던 아들이 말이다. 그렇다. 때론 백 마디 말보다 노래 한 소절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1985년 평양에서 소프라노 이규도가 `그리운 금강산`을 불렀을 때 이북 동포들이 당국의 당부도 아랑곳하지 않고 모두 일어나 박수를 쳤다. 몇 십 년 동안 굳게 닫혀 있던 동포의 가슴을 한순간 열게 만든 것은 바로 음악이었다.
필자의 기억 한 자락을 되돌아본다. 미국에서 10년 동안의 타향살이 끝에 잠시 집에 돌아와 늙은 어머니를 뵈니, 어머니는 치매가 깊어져 3대 독자인 아들을 몰라보셨다. 며칠 동안 그 곁에서 "어머니, 저 돌아왔습니다"라고 아무리 외쳐보아도 어머니는 묵묵부답이었다. 그런데 어머니와 헤어지기 30분 전에 문득 이런 생각이 났다. `아! 어머니가 즐겨 부르시던 노래를 불러드리면, 혹시?` 필자는 평소 어머니의 18번인 제주도 민요 `이야옹타령`을 부르기 시작했다.
"이야옹 야~옹 다 일을 말인가."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다. 몇 해 동안 말을 잃었던 어머니가 "서~귀포~해녀들~" 하고 따라 부르시는 것이 아닌가! 필자는 어머니 품에서 어머니 생의 마지막 노래인 이야옹타령을 함께 불렀다. "이야옹 야~옹 그렇고 말구요."
[고학찬 예술의전당 사장]
*. 내 인생의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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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3.10.15 17:35:19 | 최종수정 2013.10.15 17:40: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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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년과 달리 드높고 푸른 하늘. 아~ 천고마비의 계절. 우리나라가 자랑했던 가을 하늘 색깔이 바로 이런 색깔이구나….
가을은 다른 말로 귀하디 귀한 의미의 금(金)을 붙여 `금추`(金秋)라고도 부르지 않던가. 이렇게 아름다운 계절을 옆에 꽉 붙잡아두고 싶은 욕심마저 들곤 한다. 하지만 이런 욕심을 갖는 마음 한편에는 빠르게 흘러가는 세월에 대한 아쉬움이 있다. 그리고 지금껏 정신없이 동분서주한 일상을 떠올리며 좀 더 시간이 허락되면 더 좋은 결실을 맺지 않을까 하는 바람도 있으리라.
우리나라의 가을은 들녘의 곡식과 과일을 거두는 수확의 계절이다. 동시에 조상과 하늘에 감사하며 이웃과 함께 나누는 계절이기도 하다. 가을에는 고유명절인 중추절을 비롯해 국조인 단군이 나라를 세운 날을 기념하는 개천절,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이고 훌륭한 훈민정음 발표를 기념하는 한글날 등 즐거움과 경사의 날도 풍성하다.
이런 가을의 아름다움과 풍요를 느끼면서 문득 한편으로는 곧 다가올 내 인생의 가을을 생각해 본다.
일찍이 약관의 나이로 항일운동으로 일본에서 옥사하신 윤동주 시인.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이라는 이 시에서 젊은 청년이었던 윤동주 시인은 미래에 다가올 인생의 가을을 생각하며 인생을 열심히 살았느냐고? 남에게 상처 준 일이 없었느냐고? 나와 가족에게 부끄러운 일이 없었느냐고? 이웃과 사회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했느냐고? 어떤 열매를 얼마만큼 맺었느냐고? 자문한다.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가겠다는 각오의 시처럼 필자도 자신을 반성하고 되돌아보게 한다.
사계절이 아름다운 우리나라 금수강산. 그 가운데서도 가장 풍요롭고 아름다운 우리의 가을처럼 우리 인생의 가을도 풍요와 따스함으로 가득 채워졌으면 좋겠다.
우리 주위의 불우한 이웃과 사회에 배려와 정을 함께 나누는 따뜻한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 그리고 다가올 내 인생의 가을도 더 큰 보람과 결실, 보석처럼 빛나는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삶을 가꾸기 위해 하루하루 새로운 각오와 다짐으로 삶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해 본다.
2013년 가을이 깊어간다. 사색의 계절, 결실의 계절인 가을을 헛되이 보내고 싶지 않다.
[박혜린 옴니시스템(주) 대표이사]
*. 바다의 실크로드
얼마 전 터키에서 `이스탄불-경주세계문화엑스포`가 열렸다.
경상북도는 고대 실크로드의 동쪽 끝이 경주(서라벌)라는 점을 알리기 위해 경주~중앙아시아~이스탄불에 이르는 1만7000km를 탐사했다.
고대 동서양을 잇는 교역로는 유목민들이 이용한 초원의 `스텝로드`와 사막을 가로지르는 실크로드로 알려진 `오아시스로드`, 바다를 통한 `해상 실크로드`가 있었다.
실크로드는 8~9세기 `바다의 실크로드`라 불리는 해상무역로에 동서교역로의 주인자리를 내줬다. 해상 실크로드는 중국과 이슬람세계에 의해 개척됐다. 이들 두 세계는 바닷길을 통하면 저렴한 비용으로 많은 화물을 운송할 수 있는 해상운송의 장점을 일찍 알았다.
바다의 실크로드를 통한 무역은 아랍인들이 주도했다.
아랍 상인들은 계절풍이 불기 시작하는 4월 초 페르시아만에서 출발해 오만 해협의 소하르나 무스카트항에 기항했다.
약 한 달간의 항해 끝에 인도 남서부 항구에 도착하게 되면 그곳에서 다시 보급품을 싣고 동서 해상교역의 중간 기착지인 말라카로 향했다. 이어 싱가포르를 거쳐 태국의 시암만, 캄보디아와 참파를 거쳐 중국 남부 해안의 항구에 도착하게 된다. 최종 목적지는 광저우였다. 이들은 광저우에서 출발해 취안저우, 푸저우, 항저우, 량저우를 중심으로 번방(蕃坊)이라 불리는 대규모 이슬람 공동체를 형성했다.
아랍인들은 당에 거주하던 신라인들을 통해 신라의 존재를 알게 됐고 뱃길로 울산항까지 항해해 경주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처용의 전설을 낳은 아랍인들이 신라에 진출했다. 이들이 들여온 세계 각지의 고가품과 사치품이 신라사회에 범람하자 834년에는 수입을 금지할 정도였다.
중국을 통해 경주까지 이어진 바다의 실크로드는 고려가 1259년부터 몽골의 간섭을 받게 되면서 퇴조하고 대신 육상 실크로드가 다시 부상했다.
유교사상을 앞세운 명의 건국과 조선왕조가 들어서면서 바다의 실크로드를 통한 문명교류는 퇴조하게 된다. 대신 해상 실크로드는 포르투갈 등 유럽세력이 동양으로 진출하는 길이 되었다.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과학기술과 항해ㆍ조선술을 가진 이슬람세력과 바다의 실크로드를 통한 교류가 계속되었다면 이후 우리의 해양진출 역사는 분명 달라졌을 것이다.
[김석균 해양경찰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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