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와 정약용, 용과 구름의 만남
풍운지회(風雲之會)는 구름과 용이 만나고 또 바람과 범이 만나듯이 성군(聖君)과 현신(賢臣)이 서로 만나 의기투합하는 것을 일컫는다.
풍운지회의 대표적인 예로는 정조와 정약용의 만남을 들 수 있다.
궁정학자로서 정약용은 정조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다.
정약용은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에서 자신의 삶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임금의 은총을 입어 가까이 보좌하는 자리에 나갔으며 심복으로 신임을 받아 아침저녁으로 모셨다.
" 하지만 정조가 정약용을 각별하게 아꼈던 이유가 그가 문재(文才)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약용은 대과(大科)의 1차 시험에는 네 차례나 합격했지만 매번 2차 시험에서는 합격하지 못했기 때문에 정조에게
"그래서야 대과에 급제할 수 있겠는가"란 질책을 받기도 했기 때문이다.
정조와 정약용의 관계에서 흥미로운 점 중 하나는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둘 간의 연결고리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정조는 사도세자와 관계된 중요한 일들을 주로 정약용에게 맡겼다.
예를 들면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墓)인 현륭원 능행을 위해 한강에 설치할 주교 가설에 대한 설계를 정약용에게 명령하였고
또 사도세자를 추모하기 위해 축성한 수원 화성의 설계를 정약용에게 맡겼다.
그 후 정조는 정약용을 사도세자에 대한 호칭을 높이기 위해 설치한 임시 기구인 상호도감의 도청랑에 임명하였으며 화성에서 열리는 사도세자의 회갑잔치 때 왕실 호위 임무도 맡겼다.
정조가 정약용을 각별하게 아꼈던 것은 효심이 지극했던 정조의 눈에 정약용은 사도세자를 떠올리도록 만드는 독특한 특징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 정약용은 사도세자가 비극적으로 생을 마친지 한 달 후에 태어났다.
정약용이 세자 책봉을 축하하기 위한 증광감시에 합격했을 때 정조를 배알할 기회가 주어졌다.
그때 정조는 정약용에게 고개를 들라고 한 후 몇 살인지를 물었고 그가 임오년 출생이라는 점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둘째, 사도세자와 정약용 모두 천연두를 앓은 적이 있으며 그들의 삶에서 천연두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건이라는 점이다.
정약용은 어렸을 때 천연두를 앓았고 그 때문에 오른쪽 눈썹에 그 자국이 남아 눈썹이 셋으로 나뉘었기 때문에
`삼미(三眉)`라는 별칭을 얻었다.
그리고 사도세자는 어렸을 때 천연두를 앓았는데 전통 무가(巫歌)에서는 사도세자를 호구별성(戶口別星)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호구`는 마마신을 의미하고 `별성`은 원한을 품고 죽은 남성 신격을 뜻한다.
마지막으로 사도세자와 정약용 모두 당쟁의 와중에서 노론(老論)의 터무니없는 모함과 박해를 받은 인물들이란 점이다.
정조의 관점에서 볼 때 사도세자는 노론의 모함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당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정약용 역시 `자찬묘지명`에서 악당들과 악인들(노론)이 자신을 죽이기 위해 유언비어를 만들어냈다고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정조는 정약용을 바라보면서 11살 때 할아버지 영조에게 뒤주에 갇힌 생부를 살려 달라고 간청했지만 끝내 구명해 낼 수 없었던 사도세자의 모습을 떠올렸던 것으로 보인다.
비록 정조는 세손 시절에 노론의 모함으로부터 사도세자를 지켜내지 못했지만 군왕이 되었을 때 정약용만큼은 굳건하게 지켜줄 수 있었다.
이것을 심리학에서는 이타주의라고 한다.
이처럼 이타주의를 통해 맺어진 정조와 정약용의 풍운지회는 조선시대 최고 문예 부흥기를 창출해 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고영건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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