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이병철 35년전`월街 선언`
◆ 삼성 신경영 20년 / 이와쿠니의 비밀노트(상) ◆
"여기 제 삼남(三男)이 삼성의 회장이 될 때쯤 삼성은 세계 톱 기업이 될 것입니다.
그때 삼성 경영에 도움이 될 여러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지금부터 35년 전인 1978년 어느 날, 미국 뉴욕 월스트리트의 모건스탠리 회장실. 삼성그룹 창업자인 이병철 선대회장이 옆에 앉은 삼남 이건희 부회장을 가리키며 이런 인사말을 건네자 일순 정적이 흘렀다.
이 자리에는 프랭크 페티토 모건스탠리 회장과 시드니 블락실 국제부문 담당 상무, 이와쿠니 데쓴도 아시아담당 부장이 배석했다.
모건스탠리ㆍ메릴린치 등에서 오랫동안 근무한 일본 이즈모시 시장, 중의원 4선 의원 등을 지낸 이와쿠니 전 시장은 이건희 삼성 회장의 신경영 20주년을 기념해 매일경제와 단독 서면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는 "세계 금융의 중심지인 월가 한복판의 투자은행 회장실에서 삼성의 후계자가 삼남 이건희라는 사실을 언급한 점, 그것도 미국인과 일본인을 산증인으로 삼아 자신의 후계자에게 `세계 1등 기업을 만들라`는 큰 사명을 전달한 이병철 창업자의 발상이 무척 드라마틱했다"고 회상했다.
이와쿠니 전 시장은 그로부터 15년 후인 1993년 일본 이즈모시에서 이건희 회장과 두 번째 특별한 만남을 가졌다.
*. 이와쿠니 전 시장이 증언한 35년전 삼성의 담대한 포부
1등을 꿈꾼 삼성…그래서 父子는 월가 한복판으로 갔다
"세계 일등기업 되려면 日서 배우고 美서 승부를"
아들에게 큰 사명 전달하던 모습…매우 드라마틱
1시간 일찍 출근하는 `삼성 타임`도 경쟁력키워

장황하게 35년 전 일을 얘기했지만 삼성이 세계 기업으로서 첫발을 내디딘 것도, 삼성이 보여준 경이적 발전의 근원도,
모두 그때 그 장소 아버지와 아들이 의기투합한 장면 속에 존재했다."
1978년 미국 뉴욕 월스트리트에 자리 잡은 모건스탠리 본사 회장실에서 이병철 선대회장과 이건희 당시 부회장을 접견했던 이와쿠니 데쓴도 이즈모시 전 시장(당시 모건스탠리 아시아담당 부장ㆍ사진)은 그날의 일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삼성 신경영 20주년을 맞아 진행한 매일경제신문과 단독 인터뷰에서 이 회장 부자가 35년 전 모건스탠리 본사를 방문했을 때 받았던 강렬한 인상을 생생하게 전달했다.
당시 이병철 선대회장은 "모건스탠리가 세계 정부와 여러 기업들을 고객으로 삼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여기 제 아들이 삼성 회장이 될 때쯤에는 삼성이 세계 1위 기업이 될 것이다.
그때 삼성 경영에 도움이 될 여러 가지 조언을 부탁드린다"며 프랭크 페티토 모건스탠리 회장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와쿠니 전 시장은 "당시 그 자리에 있던 페티토 회장과 시드니 블락실 국제담당 상무는 솔직히 삼성에 대해 잘 몰랐다.
하지만 이병철 선대회장의 겸손함과 세계 최고 기업이 되겠다는 분명하고 높은 목표에 배석자 모두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회상했다.
이병철 선대회장이 "세계 최고가 되려면 세계 최대 시장이 있는 미국에서 승부를 봐야 한다.
미국의 톱 기업인 GM, GE, IBM, 코닥, 존슨&존슨, 엑손 등을 고객으로 하는 모건스탠리를 먼저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이를 직접 실행하는 대담함을 보였다는 것.
이병철 선대회장은 세계시장에서 성장하기 위해 일본을 잘 배우고 미국과 좋은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생각을
모건스탠리 회장과의 면담 내내 드러냈다.
이와쿠니 전 시장은 "이건희 회장도 일본과 미국에서 공부해 아버지의 생각과 일치하는 점이 많았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그런 부자간 일체감이 있었기에 삼성의 발전이 가능했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병철 선대회장에게 놀랐던 또 한 가지는 월스트리트 한복판의 투자은행 회장실이라는 곳에서 삼남을 후계자라고 소개하고,
아들이 삼성 회장이 될 때쯤 세계 1위 기업이 될 것이라고 공언한 점이다.
이와쿠니 전 시장은 "미국인과 일본인을 산증인으로 해 자신의 아들에게 큰 사명을 전달하고자 한 드라마틱함이 인상 깊었다.
이병철 선대회장은 정말 훌륭한 발상을 지닌 분이었다. 이것이야말로 후계자에 대한 최고의 유언 아닌가"라고 경탄했다.

고 이병철 삼성그룹 선대회장(왼쪽 셋째)이 1982년 미국 보스턴대 명예박사학위 수여식 후 열린 리셉션에서 외국인들과 환담하고 있다. 오른쪽 둘째가 삼성 후계자인 이건희 당시 부회장. <매경DB>
삼성과 재계에 따르면 이병철 선대회장은 1976년 위암 수술을 받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기 전 가족회의를 열어 "앞으로 삼성은 삼남 건희가 이끌어가도록 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병철 선대회장은 1977년 8월 일본 닛케이비즈니스와 인터뷰에서 "신문ㆍ방송 부문 이사를 맡고 있는 삼남 건희가 열의가 있어
후계자로 정했다. 삼성 정도의 규모면 역시 경영능력이 없으면 안 된다.
장남 맹희는 기업에 맞지 않아 스스로 떠났고, 차남 창희는 중소기업이라도 혼자 해보겠다며 독립해 나갔다"고 밝혔다.
이병철 선대회장의 공식 자서전인 호암자전의 원본(原本)에도 경영권 승계에 대해 나와 있다.
이 선대회장은 "건희가 통합경영에 뜻을 두고 성의껏 노력하고 있으므로 삼성의 경영을 삼남에게 계승시키기로 했다"고 적시했다.
1970년대 초에 모든 법적ㆍ제도적 절차를 끝내고 그런 방향으로 체제를 굳혀왔다고 적어 승계 작업을 오랫동안 준비해왔음을 시사했다.
이와쿠니 전 시장은 `삼성타임`에 대해서도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그는 "한국은 세계 주요국 중 서머타임을 연중 채택하는 특이한 나라"라고 설명했다.
한국은 지리적으로 도쿄 시간대보다 30분 늦는 서쪽에 위치하지만 1961년부터 도쿄 표준시(동경 135도)를 따르고 있어 매일 30분씩 빠르게 일과를 시작하는 서머타임을 사실상 연중 채택하고 있는 셈이다.
이와쿠니 전 시장은 거기다 삼성 등 한국 대기업의 출근시간이 일본 경쟁 업체보다 1시간가량 빠른 점을 들어 "일본 등 어느 글로벌 기업보다 두뇌(머리)를 아침 일찍 활용하는 게 경쟁력 상승으로 이어졌다"며 `삼성타임`의 위력을 부러워하기도 했다.
1987년 삼성 경영권을 물려받은 이건희 회장은 1993년 신경영 선언 이후 삼성 임원들과 함께 일본 이즈모시를 전격 방문했다.
일본의 보수적이고 작은 도시가 이와쿠니 시장의 행정 개혁으로 `환골탈태`한 현장을 눈으로 보고 신경영 개혁에 참고하기 위해서였다.
이와쿠니 전 시장은 "일본의 많은 대기업과 지자체가 이즈모시에 관심을 보였지만 외국의 재벌 총수가 수많은 임원을 거느리고 내방한 것은 처음이었다"며 "이 회장과 15년 만에 만나게 돼 기뻤고 돌아가신 선대 회장의 추억을 떠올리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이건희 회장과 이와쿠니 씨의 35년 전 월스트리트 인연이 일본에서 이어진 것이다.
이와쿠니 전 시장은…
`미국 월가 투자은행을 두루 거친 국제금융 전문가, 일본 이즈모시장, 중의원 4선 의원, 대학교수, 신문 칼럼니스트….` 이와쿠니 데쓴도 이즈모시 전 시장(77)을 따라다니는 명함은 이처럼 화려하다.
그는 1936년 오사카에서 태어나 일본 도쿄대 법대를 졸업하고 1959년 닛코증권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1977년 모건스탠리로 자리를 옮겨 런던지점, 뉴욕 본사, 도쿄지점 등에서 근무했다.
1984년 메릴린치 일본법인 사장ㆍ회장을 역임했고 1987년에는 메릴린치 본사 수석부사장을 맡았다.
이와쿠니 전 시장은 1989년 민간기업 활동을 접고 인구 10만명인 이즈모시 시장 선거에 뛰어들었다.
그는 6년간 이즈모시장으로 일하며 `공공 행정 분야는 최대 서비스 산업`이라는 신념을 실천에 옮겼다. 덕분에 행정 능률은 두 배 높아졌다.
그는 1996년부터 2009년까지 일본 중의원 4선 의원(민주당)을 지내며 정치 개혁에
앞장 섰다.
*. 신경영 선언후 이와쿠니 찾아간 이건희…악천후 뚫고 헬기 이동 강행
"이건희 회장을 비롯한 삼성 경영진은 1993년 여름 일본 규슈의 도요타자동차 사업장을 둘러본 뒤 시마네현 동부에 위치한 작은 도시인 이즈모시로 향했다.
먹구름이 끼어 있는 궂은 날씨였지만 우리는 헬리콥터에 몸을 실었다.
구름을 뚫고 날아가는데 발 아래 고압선이 보이는 등 무척 불안했다. 그래도 이와쿠니 이즈모시 시장을 반드시 만나려는 이 회장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20년 전 `신경영 선언` 당시 삼성비서실 임원으로서 동행했던 이창렬 전 일본삼성 사장이 이건희 삼성 회장과 이와쿠니 데쓴도 이즈모시 전 시장의 만남을 이같이 풀어놨다.
이창렬 전 사장은 최근 매일경제신문과 단독 인터뷰에서 "이와쿠니 전 시장은 지방행정을 개혁한 주인공으로 매우 주목받는 인물이었다"며 "이 회장과 삼성 경영진은 이와쿠니 시장과 면담한 후 여관에 돌아와 새벽 3시까지 토론을 했다"고 전했다.
그리고 아침에 바로 다음 행선지로 이동하는 강행군을 이어갔다.
이 전 사장은 "이즈모시에서 오사카로 이동할 때는 날씨가 더욱 나빠져 버스를 대절했다"며 "이 회장을 비롯해 경영진이 다 같이 한 버스에 타고 5시간 정도 이동했다"고 설명했다.
당시 고질적인 `문제`는 버스에서 터졌다.
피곤한 이 회장이 버스에서 눈을 붙이자 고속도로 휴게실에 들르지 않고 계속 버스를 이동시킨 것. 나중에 이 회장은 크게 화를 냈다고 한다.
"버스를 타고 장시간 이동하면 중간에 휴게소에서 머리를 식히고 화장실도 가고 해야 하는데, 내가(회장이) 자고 있다고 해서 휴게소에 들르지 않으면 나머지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이런 행태를 고치지 않으면 절대 일류가 될 수 없다."
이 회장의 불호령은 버스에서 내릴 때까지 계속됐다고 한다.
◆ 삼성 신경영 20years later ① ◆
먼지 쌓인 천덕꾸러기 삼성TV, 프리미엄 브랜드 되다
◆ 삼성 신경영 20years later ① ◆ "20년 전만 해도 삼성이란 브랜드를 아는 미국인은 극소수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삼성을 모르는 미국인이 없죠. 도대체 20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LA 베스트바이 매장에서 만난 팻 맥건 지점장은 삼성 스마트TV를 보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렸다.
맥건 지점장은 1993년 2월 이건희 회장이 바로 이곳을 방문해 매장 구석에 먼지 쌓인 채로 방치돼 있던 삼성 가전제품을 목격한 일화를 들려주자 "지금 삼성전자(종목홈)를 생각하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라며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현재 삼성전자는 북미 TV 시장에서 확고한 1위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
2006년부터 점유율 1위를 한 번도 내준 적이 없다.
2004년 삼성 평판TV는 점유율 5.9%(매출 기준)을 기록해 10%대였던 샤프 파나소닉 등 일본 업체에 비해 절반 수준에 불과했다.
그러던 게 2006년 점유율 14.3%를 찍으면서 소니를 누르고 1위로 올라섰다.
이후 삼성전자는 승승장구했다.
지난해엔 무려 30.6%라는 점유율을 기록하면서 한 자릿수에 불과한 일본 업체들을 저만치 따돌렸다.
마침 맥건 지점장은 삼성 TV가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2006년부터 삼성전자 TV를 쓰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미국 시장에서 'TV는 소니'라는 인식이 있었는데 과감하게 삼성 TV를 선택했어요.
소니만 알던 와이프한테 '잘못 산 것 아니냐'는 질책을 들었지만 실제로 사용해 보니 화질에 대한 가족들 만족도가 매우 높았습니다.
이제 저희 가족뿐 아니라 미국 가정 곳곳에서 삼성 TV를 찾아볼 수 있게 됐죠."맥건 지점장이 삼성 TV 진가를 알기 2년 전인 2004년. 삼성전자 반도체 인력 수백 명이 사업 성과가 '형편없던' TV사업부로 대거 이동했다.
이건희 회장 신경영 선언에 따른 후폭풍이었다.
윤종용 당시 삼성전자 부회장 등 전자부문 최고경영진 40여 명이 모인 그룹 차원의 태스크포스(TF)도 탄생했다.
바로 TV일류화추진위원회다.
그룹 역량을 총동원해 삼류 취급을 받던 삼성 TV를 세계 1등으로 만들자는 게 목표였다.
화질을 좌우하는 반도체 개발에 기술자 500여 명이 매달렸고 LCD사업부는 대형 패널을 만들어 이를 뒷받침했다.
디자인팀 역시 전에 없던 감각적인 TV 디자인을 고민했다. 이렇게 탄생한 보르도 TV를 시작으로 삼성은 세계 TV시장 1등 고지를 밟았다.
신경영 선언 13년 만에 이룬 성과다.
맥건 지점장은 이 매장에서 삼성 55인치 TV 'F8000' 모델이 가장 인기가 높다고 귀띔했다.
이를 반영하듯 삼성 TV는 경쟁사 제품과 비교해 목좋은 자리에 전시돼 있었다.
맥건 지점장은 "소문난 화질을 보다 쉽게 체험해 보도록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조명이 가장 풍부한 매장 한가운데에 삼성 3D TV와 스마트 TV가 나란히 진열돼 있고 손님들은 이를 경험하기 위해 수시로 긴 줄을 섰다.
이 매장에는 TV뿐 아니라 다양한 삼성 제품이 소비자 눈길을 사로잡고 있었다.
세일즈 매니저인 카일 씨는 "TV도 대단하지만 세탁기와 같은 생활가전 분야에서도 삼성 제품이 주목받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미국 세탁기 시장은 전통적으로 GE와 월풀이라는 걸출한 브랜드가 주름잡고 있지만 양사 아성을 삼성전자가 점차 허물고 있다고 베스트바이 측은 설명했다.
실제로 월풀 프리미엄 세탁기 옆에 삼성전자 드럼세탁기가 어깨를 나란히하고 있었다.
삼성 세탁기 위상이 그만큼 높아졌다는 방증이다.
남편과 함께 드럼세탁기를 주의깊게 살펴보던 멜리사 씨는 "삼성 세탁기가 다른 제품보다 가격경쟁력이 있고
기술도 뛰어난 것 같다"고 말했다.
카일 씨는 "삼성 가전은 프리미엄 제품도 있지만 여러 가격대 제품을 동시에 선보여 소비자 선택권을 넓혀줬다"고 말했다.
모바일 제품인 갤럭시S와 갤럭시노트 등을 전시한 베스트바이 '숍인숍'. 삼성전자가 현지에서 직접 교육한 직원들이 손님들에게 제품 기능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현지 소비자들이 삼성 제품에 관심이 높은 만큼 제대로 설명하고 경험할 수 있도록 적극 나서는 것이다.
숍인숍 직원들은 전부 파란색 삼성전자 유니폼을 갖춰 입고 손님을 응대했다.
최근 미국 전역 베스트바이에는 삼성 전용 매장이 숍인숍 형태로 속속 들어서고 있다.
다음달 말이면 미국 내 1050개 베스트바이 매장에 입주를 완료한다.
김양규 삼성전자 북미총괄부사장은 "폭발적인 소비자 반응을 보고 삼성 숍인숍에 대해 반신반의하던 베스트바이 사장도 놀랐다"며 "다른 양판점들도 삼성전자에 숍인숍 입점을 요청하고 있다"고 전했다.
김 부사장은 "TV, 백색가전 등 시장이 줄어드는 역성장을 하고 있지만 삼성전자는 어려운 와중에도 괄목할 만한 성장률을 보이고 있다"며 "올해 북미 지역 가전시장에서 과거 3년보다 더 빠른 성장을 거둘 것으로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 김양규 북미총괄법인장 "삼성형 `멜팅 팟`…신경영 엔진으로"
"20년 전 신경영 선언이 없었으면 삼성전자(종목홈)는 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지난날 얼마나 많은 기업이 문을 닫았습니까."삼성전자 뉴저지법인에서 만난 김양규 북미총괄부사장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신경영 선언'에 대한 소회를 이같이 밝혔다.
김양규 부사장은 이건희 회장이 외국에 있는 한국 인재를 삼성전자로 데려오라는 특명을 제시한 뒤 삼성에 합류한
국외파 1호 그룹에 속한다.
이 회장은 이병철 선대 회장 뒤를 이어 경영 전면에 나서면서 우수 인재 확보에 열을 올렸다.
대학을 졸업하고 프랑스에서 공부하던 김 부사장은 1986년 삼성전자에 입사한 이래 한 우물을 팠다.
"외부 인력과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이 이미 30여 년 전부터 이 회장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한국 기업이 하지 못했던 인재 융합 정책을 최초로 시행한 셈이지요."
이 회장이 외국에서 공부한 인재들을 삼성전자로 모으면서 조직 내 다양성과 창조적인 사고가 확산됐다고 김 부사장은 전했다.
외부 인재와 공채 인력이 한데 섞여 삼성형 '멜팅 팟(Melting Pot)'을 이뤄낸 셈이다.
김 부사장은 프랑스 주재원, 법인장을 거쳐 TV 전문가가 됐다.
프랑스법인장을 지내면서 휴대폰ㆍTV 분야에서 삼성이란 브랜드를 최고 반열에 올려놓기도 했다.
그는 1993년 당시 이 회장이 삼성전자가 암(癌)에 걸렸단 말까지 했을 때 어떤 임직원도 이해하지 못했다고 회상했다. 당시 삼성전자는 국내 1등 기업이었고 외국에선 반도체 투자 성과를 서서히 거둬가던 시점이었다.
이 회장 말을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임직원들이 그가 위기의식으로 밤잠을 설친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고는 그제야 열심히 뛰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회장이)신경영 선언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계적으로 디지털 혁명이 일어났어요. 삼성전자가 성장동력으로 지목했던 분야와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졌습니다.
이때부터 삼성인들 마음속에 최고경영자에 대한 '신뢰'가 자리 잡기 시작했죠."[
*. 이건희 회장 68일간의 신경영 여행
◆이건희 삼성 회장이 1993년 6월 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켐핀스키호텔에서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자"며 삼성그룹 임직원들에게 전면적인 변화와 혁신을 주문하는 삼성 신경영을 선언했다. 이 회장은 전자 관계사 임원들과 LA 가전매장을 방문해 매장 한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천덕꾸러기 신세로 방치된 삼성 전자제품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6월 1일 삼성 일부 사장단과 일본을 다시 방문한 이 회장은 6월 4일 도쿄 오쿠라호텔에서 일본인 고문 몇 명과 밤샘 회의를 했다. 이를 받아든 이 회장은 6월 5일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후쿠다 보고서를 읽고 격분해 삼성 임원 200여 명을 독일로 긴급 소집했다. 글로벌 스탠더드에 적응하지 못하면 영원히 이류, 삼류로 뒤처진다, 나 자신부터 변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변하게 할 수 없다, 뛰든 걷든 한 방향으로 함께 가야 하며 동료 뒷다리를 잡는 일은 없어야 한다 등 변혁을 촉구하는 '사자후'를 연일 토해냈다.
*. 구태 깨부수고 환골탈태…`오늘의 삼성` 일군 혁신의 현장들
2013/05/27 17:15:10 매일 이 과정에서 삼성의 공장과 각 사업장은 한국을 대표할 '명품' 이미지를 획득했다. 질 경영의 표본으로 거듭난 삼성전자(종목홈) 구미사업장, 복합화의 롤모델 중 하나인 삼성서울병원, 국제화를 선도한 삼성 국제경영연구소 등 3곳을 조명하면서 신경영의 의미를 추적했다. 그런데도 95년 삼성전자가 판매한 무선전화기 가운데 불량품이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나는 즉시 시중에 내보낸 15만대 전부를 새 제품으로 교환해 주거나 회수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회수한 제품 모두를 공장 전체 임직원들이 보는 앞에서 소각하도록 했다."(이건희 삼성 회장의 저서 '이건희 에세이'에서)삼성전자 구미공장에 벌어진 일명 '불량제품 화형식'은 삼성 생산현장의 불량 불감증에 경종을 울린 충격적 사건이었다. 1994년 삼성전자는 무선전화기의 품질이 충분히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양산을 추진해 불량률 11.8%라는 암담한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5개 전화기 모델 중 4개 모델의 생산을 중단했지만 한번 잃은 시장의 신뢰를 회복하기는 역부족이었다. '품질은 나의 인격이요, 자존심'이라고 쓰인 현수막이 애처롭게 나부꼈다. 운동장 한가운데 무선전화기, 키폰, 팩시밀리 등 15만대의 제품을 쌓아놓고 10여 명의 직원들이 육중한 해머를 내리쳤다. 산산조각난 제품들은 곧 뜨거운 화염 속에서 잿더미로 변했다. 환골탈태했다. 특히 휴대폰 생산의 본산인 구미공장은 월드 베스트급의 생산 역량을 다른 해외 공장에 전수하는 '마더 팩토리'(mother factory)로 거듭났다. 삼성 질 경영의 표본으로 자리잡은 셈이다. 도입했다"면서 "구미공장은 세계 최고 수준의 생산성을 자부한다"고 말했다. 삼성전자 무선사업부는 올해 1분기에만 6조5000억원의 영업이익을 거뒀다. 이는 삼성전자 전체 영업이익의 74%에 해당하는 놀라운 이익 규모다. 500억원어치 제품을 폐기 처분하면서 살을 깎는 고통을 감내한 결과, 삼성그룹 전체를 먹여 살리는 '캐시카우' 사업으로 십수 년 만에 완벽하게 재탄생한 셈이다.
"병원을 해도 병원연구소, 의료기기연구소, 병리학연구소를 같이 만들어야 한다. "이건희 삼성 회장이 1993년 6월 신경영 선언 이후 밝힌 '병원 복합화' 청사진이다. 이 회장은 "병원에 연구소는 물론이고 대형 슈퍼, 놀이터, 공부방, 수영장, 볼링장 등 복지시설을 넣어도 좋다"며 "간호대학도 단지 내에 함께 세워보자"고 주문했다. 이 회장의 이 같은 구상은 1년 뒤 삼성서울병원을 개원하면서 구체적인 실행에 옮겨졌다. 삼성서울병원은 1994년 개원 초기 병원연구단지를 복합화하면서 '환자 중심'이라는 새로운 가치를 내세웠다. 장례식장의 신모델을 선보이며 한국 장례문화 변화를 선도했다. 병원과 연구소 간 융복합을 장려하고 의학과 유전자치료를 결합한 삼성유전체연구소를 설립하기도 했다. 서로 연관성이 있는 인프라, 시설, 기능, 기술이나 소프트웨어를 효과적으로 결합시켜 유기적인 상승 효과를 내도록 하는 게 복합화다. 이는 행정, 도시, 산업, 기업, 복지 등 모든 분야에 적용할 수 있다. 모든 사물, 기계, 성능을 2개 합치면 가격은 2배가 되는 게 아니라 3~4배가 된다고도 했다.
◆ 삼성 신경영 20years later ② ◆
하지만 삼성은 세계 최초로 64M D램 개발에 성공해 일본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64M D램은 삼성전자(종목홈)의 극일(克日) 1호 제품으로 기록됐다. 당시 개발팀장은 권오현 삼성전자 부회장이다. 일본이 최고라고 믿던 LCD 분야에서 소니가 삼성에 먼저 합작을 요청했기 때문. 또 한번의 추월은 2006년에 일어났다. 삼성전자는 아날로그 TV 시대를 군림하던 소니를 추월하고 글로벌 TV 시장 1위에 올랐다. 화질, 디자인 모든 면에서 소니를 넘어섰다는 평가를 받았다. 일본 주요 전자업체 9개사의 영업이익을 합친 금액(1519억엔)이 삼성전자 영업이익(3260억엔)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 것. 오네다 노부유키 당시 소니 부사장은 "삼성전자에 패한 이유는 제품 경쟁력 차이"라고 고개를 숙였다. 일본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삼성전자를 공부했다. *.日역사 비디오 수십번 본 이건희…결국日 TV·반도체 제쳐
전통 양식의 본관 건물과 최근 신설한 남쪽 별관이 운치 있게 이어져 있다. 삼성이 호텔신라를 세우면서 이곳을 벤치마킹했고, 이병철 삼성 선대 회장과 이건희 삼성 회장이 일본 체류 중 자주 묵던 장소였다. 이 회장이 1993년 6월 4일 삼성전자(종목홈) 임직원 10여 명과 함께 기술개발 대책회의를 연 장소도 바로 오쿠라호텔이었다. 신경영 선언이 있기 사흘 전 모임으로 이날 무거운 분위기 속에 회의를 마친 이 회장은 일본인 고문들을 별도로 불러 새벽 5시까지 격정 토론을 벌였다. 당시 회의장 이름은 아케보노(曙). 일본어로 '새벽'이라는 뜻이다. 그는 20년 전 삼성 임직원들의 숙박과 안내를 담당한 매니저였다. 당시 삼성에 대해 잘 몰랐지만 앞으로 크게 될 회사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부산사범부속초등학교 5학년 때 이병철 선대 회장은 삼남 이건희를 일본 도쿄로 유학 보냈다. 이때가 1953년 열두 살 때였다. 그후 서울사대부고를 졸업하고 와세다대로 진학한 그는 일본을 통해 사물을 보고 느끼고 터득할 기회가 많았다. 여기서부터 제조에 대한 차이가 나타난다"는 이 회장의 말을 듣고 일본 문화에 대한 이해도가 깊다는 인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특히 일본 전자업체들의 선진 제품은 삼성이 배우고 반드시 극복해야 할 대상이었다. . "임진왜란 직전에 모든 면에서 일본에 비해 선진국이던 우리가 왜 여러 면에서 (일본에) 뒤지고 있는지에 대한 냉철한 반성과 자각이 있어야 한다." 그는 이어 "나는 일본에 있을 때 일본 역사를 알기 위해 비디오테이프 45개 분량을 수십 번 봤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30회 이상, 도요토미 히데요시 10회 이상, 오다 노부나가는 5~6회 봤다"며 '지일(知日)'을 재차 강조했다. 이에 당시 안복현 제일모직 관리본부장, 김순택 삼성전관 관리본부장 등 20여 명이 무려 26박27일 일정으로 일본에 건너갔다. 반도체 사업의 글로벌화와 해외 투자를 강조한 게 기억에 선하다"고 말했다. 삼성은 일본을 면밀히 벤치마킹했지만 동경 대상으로 머물게 하지는 않았다. 신경영 선언 이후 양에서 질 경영으로 전환하고 국제화와 복합화, 정보화를 한 방향으로 힘 있게 추진하면서 끝내 일본을 극복할 발판을 마련했다. 디지털 패러다임의 변화를 발 빠르게 읽은 삼성이 LCD와 OLED 시장에서 세계 선두권으로 올라서면서 일어난 지각변동이었다. *. 이창렬 前일본삼성 사장이 본 이건희 회장
이 회장은 삼성 개혁의 고삐를 세게 당겨야겠다는 생각을 단단히 갖고 있었다."삼성그룹 회장비서실 팀장과 일본삼성 사장, 삼성사회봉사단 사장 등을 두루 역임한 이창렬 전 사장도 1993년 6월 5일 이 회장과 함께 독일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수행원 6명 중 한 명이었다. 당시 직함은 회장비서실 경영2팀담당 이사. 6년간 일본삼성 사장으로 재직할 때 이 회장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한 삼성의 대표적 '일본통'이다. 이 회장이 기내식을 마치자마자 동승한 임원들을 불러 답을 구했다. 일부는 비행기 바닥에 앉았으며, 독일에 도착할 때까지 토론이 이어졌다. 그리고 독일로 떠났다. 이 회장은 일본어를 네이티브 수준으로 구사한다. 현지 젊은 사람이 못 알아듣는 겸양어도 쓸 정도다. 이 회장은 닛케이 비즈니스, 주간다이아몬드 등 웬만한 일본 경제잡지는 다 봤다. 또한 일본 드라마와 다큐멘터리, 영화도 많이 봤다. 그러면서 일본의 시대적 상황과 동시대의 한국, 중국, 유럽, 미국까지 비교하는 등 입체적인 사고를 한다. 일반인과는 차원이 달랐다.
일본 선진화가 빠르다보니 우리 미래의 한발 빠른 바로미터였지 않았을까. 일본에서는 품질이 잘못되면 회사가 망한다는 얘기가 있다. 무선전화기 화형식도 서양식 사고방식으로는 굳이 단행하지 않았을 것이다. 품질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없으면 안 되는 일이다. 지(知)ㆍ행(行)ㆍ용(用)ㆍ훈(訓)ㆍ평(評)이다. 리더가 되려면 우선 본인이 많이 알아야 하고, 아는 것을 몸소 실행하고, 주변 사람을 활용하며, 후배에게 지식과 경험을 전수하고, 자신과 후배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 知日 그리고 克日 그는 "도쿄에 가장 우수한 사람을 보내라. 일본 기술자도 데려와라. 앞선 나라에서 앞선 모든 걸 얻어내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는 "만날 1등 쫓아가 봐야 2등, 3등밖에 못한다. 월반(越班)을 해야 한다"고 임직원들을 자극했다. 그 돌파의 힘은 변화ㆍ혁신에 대한 갈망과 삼성 특유의 스피드 경영에서 나왔다는 게 삼성 안팎의 평가다. 삼성의 대응이 일본보다 한발 빨랐던 것"이라고 말했다.
◆ 삼성 신경영 20years later ③ *. 1등제품 만들려면 사람을 일류로…`삼성맨` 확 바꾼 3가지
사람의 질이 일류 수준으로 높아져야 제품과 경영의 질이 일류로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이다. 성차별, 인종차별이 그런 것이다. 학력 문제도 마찬가지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학력을 가지고 불이익을 주는 것은 옳지 못하다. 똑같은 조건에서 경쟁하도록 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잘 대우해주면 된다."('이건희 에세이'에서)모든 종류의 차별을 없애라고 강조한 이 회장의 인재철학은 삼성의 공채 제도를 '열린 채용'으로 바꾸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학점과 영어성적만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 '삼성직무적성검사(SSAT)'에 누구든 응시할 수 있다. 그만큼 인력의 문호를 개방한 것"이라고 말했다. 조기출퇴근제는 임직원들에게 삼성의 본격적인 개혁 신호탄으로 인식됐다. 당시 한국 기업들은 초과근무를 당연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 회장은 종래 10시간 하던 일을 8시간에 마치고 4시 이후 회사 밖에서 자기 계발을 하라고 독려했다. 업무 환경의 질을 높이고 업무와 생활의 균형을 제시한 셈이다. 7ㆍ4제는 추후 삼성 자율근무제의 초석이 됐다. 이 회장은 그 이듬해인 1996년 신년사에서도 디자인의 가치에 대해 다시 한번 강조했다. 다양한 분야의 시각을 공유하고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융합 교육의 산실로 자리 잡은 것이다.
◆ 삼성 신경영 20years later ④ ◆ *. 이제는 창조경영…삼성인이여, 지도에 없는 길 개척하
지난해 삼성전자가 거둔 29조원의 영업이익 중 무선사업부가 67%(19조4000억원)를 차지한 점을 감안하면 휴대폰사업 한 개가 그룹 전체 이익의 절반 이상을 책임지는 '기형적' 구조다. 삼성전자 고위 관계자는 "삼성전자가 2015년까지는 지금의 수익성을 유지하면서 성장할 것으로 기대한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글로벌 시황에 따라 호조를 띠는 사업과 위축되는 사업이 적절한 보완관계를 유지해야 하는데 지금은 삼성전자의 일부 사업을 제외하고는 고전하는 계열사가 많다는 얘기다. 삼성은 2010년 5월 태양전지, 전기차용 전지, 발광다이오드(LED), 바이오제약, 의료기기를 5대 신수종 사업으로 선정했지만 본궤도에 오르려면 다소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려면 리스크를 이겨낼 수 있는 기업 체력과 신경영 당시에 준하는 추진력ㆍ개척정신이 필수적이다. 이러한 컨버전스를 통해 새로운 시장이 탄생하는 흐름의 맥을 짚고 사업 기회를 선점해야 한다는 조언이다. 이 회장은 지난해 신년사에서도 "기존 틀을 깨고 오직 새로운 것만을 생각해야 한다. 더 개방적이고 유연하며 혁신적으로 바뀌어야 한다"며 강도 높은 변신을 주문했다.
*. 삼성 경쟁력의 원천 `패러독스 경영`
◆ 삼성 신경영 20years later ④ ◆ 이 내용은 2011년 세계적 권위를 자랑하는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HBR)'에도 일부 게재된 적이 있다. 출간을 앞둔 '삼성웨이'의 핵심 내용을 송 교수가 기고문 형태로 보내왔다. 이를 통해 1992년 이후 D램을 중심으로 메모리반도체 산업에서 1등 위치를 고수해 오면서 최근에는 경쟁자와의 시장 점유율 격차를 더욱 벌려가고 있다. 패러독스 경영이란 이처럼 차별화와 저원가, 규모의 경제와 빠른 속도 등 양립이 불가능해 보이는 요소를 동시에 추구하는 경영이다. 대규모 조직은 통제와 조정의 필요성을 증대시켜 관리 위주 경영을 하게 됨으로써 신속성을 잃어버리기 쉽다. 특히 삼성 같이 다각화된 기업집단의 경우 의사결정 구조와 관리 프로세스 등의 복잡성이 증대되어 스피디한 의사 결정과 실행이 더욱 어렵다는 게 경영학에서의 통념이었다. 서구에서는 비관련형 다각화를 추구한 복합형 기업집단의 경우 자원 배분과 경영관리의 비효율성으로 인해 한 우물을 파는 전업형 기업과의 경쟁에서 밀리는 일이 흔했다. △다각화되고 수직적 계열화되어 있으면서도 단위 사업의 전문적 경쟁력을 극대화시켰으며 △미국식 전략경영과 일본식 현장경영의 장점을 조화시켜 삼성 특유의 새로운 경영시스템을 창출함으로써 삼성식 패러독스 경영을 정착시켜 왔다. 부품과 세트를 수직적 계열화하고 관련 사업을 동시에 전개하면서 유기적 협력을 통해 복합화를 통한 시너지를 창출해냈다.
*. 李회장의 지론 담은 삼성헌법
◆ 삼성 신경영 20years later ④ ◆ 용어집을 만들 것을 주문했다. 이 회장은 구성원들의 사고와 행동을 좌우하는 가치관으로 인간미, 도덕성, 예의범절, 에티켓을 언급했다. 이는 삼성인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하는 약속으로 '삼성헌법'이라고 불렸다. 그렇다고 싫은 소리를 안하는 게 인간미는 아니다. 회사 상사가 부하의 잘못을 지적하고 꾸짓는 것이 진정한 인간미라고 했다.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부하를 내버려두는 건 부하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 인간미 없는 행동이다. 도덕성은 인간의 기본양심으로 사회규범에 따라 올바르게 행동하는 것을 뜻한다. 예의범절은 생활의 기본을, 에티켓은 다른 나라 문화를 이해하는 국제화 자세를 각각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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